울산 중구 학성동 학성공원
학성(鶴城)은 신라의 계변성(戒邊城)이라 하던 성에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새로 축성 된 왜성인데 우리측에서는 이를 도산성(島山城)이라 불러왔다. 이 성을 학성이라함은 신라말에 천신(天神)이 학을 타고 이 신두산에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수록(壽綠)을 주장하였다 하여 신학성(神鶴城)이라 하다가 뒤에 학성(鶴城)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이 성의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本城(本丸) : 남쪽을 점령 높이 50m 동서 100여m 남북 600m, 제2 本城(二之丸) : 본성 북쪽 좀 낮은 곳, 동서 100m 남북 100m 제3 本城(三之丸) : 二之丸 서북쪽, 동서 40m 남북 100m 석벽의 길이 1.300여m, 높이 10∼15m 대로 성로(城櫓) 12개 외곽의 동 서 북 3면에 토제를 쌓고 그 위에 3중의 목책을 설치, 길이 2,400여m 남쪽은 태화강에 면해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다. 도산성(島山城)의 싸음은 선조 30년(1579) 12월 23 일부터 이듬해 1월 4일 까지 혈투가 벌여졌는데 이것이 제1차 싸움이었다.
선조 30년 12월 23일부터 있었던 도산성의 공방전은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도산성을 쳐서 전왜군의 사기를 꺾으려고 23일과 24일 이틀동안 성을 공격, 마침 축성중이라 성밖에 야영하던 적을 섬멸하고 반구정의 적진과 태화강의 적 보루를 치니 이때 일대 결전이 벌어져 패한 적은 성안으로 달아나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이듬해 1월 3일까지 매일같이 치열한 화공을 퍼붓는가하면 한편으로는 서생포성(西生浦城)에서 오는 적의 응원선단을 막으며 쳐서 성채의 접근을 막고 별장 김응서(金應瑞)의 군은 성밖에서 적의 식수원을 차단하여 적으로 하여금 농성중 크게 굶주리게 하였다. 이러한 공성에도 적은 비오듯 총포를 쏘아 성에 오르지 못하게하여 조명군의 공격은 번번 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에 마침 날은 차고 비가와서 인마의 동상이 속출하고 피아의 사기는 말할 수 없이 떨어졌다. 더욱이 성중의 적은 물이 없어 오줌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빨며 벽지를 끓여먹는 등 아사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1월 4일 새벽부터 양호(楊鎬)와 마귀(麻貴)는 직접 칼을 들고 뒤처지는 자의 목을 베는 등 독전하여 최후의 총공격을 하니 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돌진하였으나 퍼붓는 적의 총탄에 희생자만 속출하고 성에 기어오르는 자가 없었다. 이 때에 적의 응원군이 염포로부터 배로 접근하고 육로로도 몰려와서 형세가 급변하자 명장 양호는 「매일 우리가 공격해도 성이 워낙 험하고 군사가 많이 없어져 이를 뺏기 힘드는데 이 판에 왜군의 구원병이 많이 있 으니 철군 했다가 뒤에 다시 공격을 꾀하겠다」면서 경주로 철군하고 후속부대는 왜군의 추 격을 받아 큰 손실을 당하고 말았다. 도산성의 제1차 싸움이 끝난 다음 豊臣秀吉은 성의 재수를 명하여 방위시설을 강화한 후 加藤淸正의 주력군 1만으로 하여금 도산성을 고수하게 하였다. 한편 제독 마귀의 군은 선조 31년(1598) 3월 29일이후 경주에 집결하고 도산성의 재공격을 준비중에 있었는데 제2차 도 산성싸움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동정군 제독 마귀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병 24,000여 조선군 별장 김응서(金應瑞) 병 5, 500여 합계 30,000명 적군(賊軍) 加藤淸正 1만 서생성수장 흑전장정(黑田長政) 5,000 계15,000 전투의 경과를 살펴보면 경주에 집결하고 있던 명군은 부총병 해생(解生)을 선봉장으로 하여 9월 21일 울산을 향해서 발진 학성산(鶴城山)에 공격준비진을 쳤다. 한편 좌수영에 있던 별장 김응서(金應瑞)는 동래온정(東萊溫井)의 적을 격파하여 적의 부산, 울산간의 연락로를 차단하였고 이날 해생(解生)은 직접 도산성의 적과 싸움을 걸어 성책 밖에 있던 천여의 적을 격파하였다. 제독 마귀는 22일 주력 2만군으로 성내의 적에 도전하 니 淸正군이 성밖으로 나와 일대회전이 벌어져 이를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성의 외책을 탈취하는 한편 방옥(房屋) 군량 마량을 다 불태우고 아성(牙城)에 접근하였으나 성내로 물 러난 적은 빗발같은 조총을 퍼부어 더 접근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동정군을 유격전을 계속하였으나 명군이 대군임을 알고 1차전투처럼 문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제독 마귀는 군사를 거두어 경주군 모화(毛火)로 물러나서 경주에 머무르더니 시월 6일 영천성(永川城)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 후 豊臣秀吉이 죽은 뒤 철수령에 따라 加藤淸正은 11월 18일 도산성채를 불태우고 퇴각하자 마귀는 성에 입성하고 일부 병력으로 추격케 하였다. 이 성을 시루를 엎은 것 같다하여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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