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산 176 외
이 고분군의 입지지형은 저평한 평지성의 구릉이며 이 일대에는 많은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내부구조가 대형 옹관으로 추정되는 예덕리 만가촌 고분군 (지방기념물 55호)이 있고 서북쪽에는 1990년 전남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된 백제계의 횡혈식 석실분으로 밝혀진 월계리 석계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신덕고분은 두 고분군의 사이에 놓여 있는데 봉토의 규모가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중심고분에 해당한다. 남북으로 배치된 2기의 신덕고분은 남쪽의 대형분은 봉토가 전방후원형이고 북 쪽의 고분은 남북자축이며 전방부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전장은 51m이며 후원 부 직경은 30m, 전방부의 전단은 25m이다. 허리 즉 세요부의 폭은 19m이다. 허리 즉세요부의 폭은 19m이다. 높이를 보면 후원부가 가장 높은데 자락에서 5m 이며 전방부 정상은 4m, 세요부는 3.25m이다. 전방부는 앞이 팔자형으로 약간 벌어져 있다. 도굴갱은 후원부의 서쪽 경사면에 있고 봉토의 자락 가장자리로는 희 미하게 도랑의 흔적이 남는 듯한데 전방부의 정면과 서쪽자락 끝에는 희미하게 나마 도랑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봉토의 축조상태는 완전한 성토분이다. '91년 발굴(국립 광주박물관) 결과에 따르면 석실은 봉토의 장축방향과는 직교하는 동서장축이며 선도를 서쪽으로 두고 있다. 석실의 구조는 장방형의 현실과 잛은 연도 그리고 묘도로 구성된 소위 모자형의 석실이다.
현실에는 중앙에서 약간 북쪽에 치우쳐서 관대가 마련되어 있고 이 위에는 관재의 일부가 남아 있다. 현 실의 4벽은 맞조림식으로 쌓았는데 아래에는 넓은 판석을세우고 위에는네 보진 할석으로 촘촘하게 쌓고 사이에는 작은 할석을 끼웠다. 천장은 2매의 판석으로 덮었으며 입구는 좌우 각 1매의 두꺼운 판석으로 세우고 그 위에 판석형의 괴석 을 얹어 이마돌로 하였다. 입구를 문비석으로 막고 그 바깥으로는 막음돌을 쌓아 놓았다. 묘도는 팔자형으로 벌려서 쌓았으나 정연하지 않다. 막음돌(폐쇠석) 끝에 는 다량의 토기르 두었는데 개배와 고배류이고 개배가 대두분이다. 묘도의 남벽 끝에는 항아리 2점이 있고 약간의 철기와 칠기의 흔적이 있다. 현실은 북벽쪽이 약간 길다. 바닥은 할석으로 고르게 깔아 편평하게 하였으며 천장과 4벽은 주칠을 하였다. 이 고분은 한일 양국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전방후원형 고분으로서는 내구조가 석실로 밝혀진 국내 최초의 고분이다.
이 고분군의 입지지형은 저평한 평지성의 구릉이며 이 일대에는 많은 고분이 분포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내부구조가 대형 옹관으로 추정되는 예덕리 만가촌 고분군 (지방기념물 55호)이 있고 서북쪽에는 1990년 전남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된 백제계의 횡혈식 석실분으로 밝혀진 월계리 석계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신덕고분은 두 고분군의 사이에 놓여 있는데 봉토의 규모가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중심고분에 해당한다. 남북으로 배치된 2기의 신덕고분은 남쪽의 대형분은 봉토가 전방후원형이고 북 쪽의 고분은 남북자축이며 전방부가 북쪽을 향하고 있다. 전장은 51m이며 후원 부 직경은 30m, 전방부의 전단은 25m이다. 허리 즉 세요부의 폭은 19m이다. 허리 즉세요부의 폭은 19m이다. 높이를 보면 후원부가 가장 높은데 자락에서 5m 이며 전방부 정상은 4m, 세요부는 3.25m이다. 전방부는 앞이 팔자형으로 약간 벌어져 있다. 도굴갱은 후원부의 서쪽 경사면에 있고 봉토의 자락 가장자리로는 희 미하게 도랑의 흔적이 남는 듯한데 전방부의 정면과 서쪽자락 끝에는 희미하게 나마 도랑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봉토의 축조상태는 완전한 성토분이다. '91년 발굴(국립 광주박물관) 결과에 따르면 석실은 봉토의 장축방향과는 직교하는 동서장축이며 선도를 서쪽으로 두고 있다. 석실의 구조는 장방형의 현실과 잛은 연도 그리고 묘도로 구성된 소위 모자형의 석실이다.
현실에는 중앙에서 약간 북쪽에 치우쳐서 관대가 마련되어 있고 이 위에는 관재의 일부가 남아 있다. 현 실의 4벽은 맞조림식으로 쌓았는데 아래에는 넓은 판석을세우고 위에는네 보진 할석으로 촘촘하게 쌓고 사이에는 작은 할석을 끼웠다. 천장은 2매의 판석으로 덮었으며 입구는 좌우 각 1매의 두꺼운 판석으로 세우고 그 위에 판석형의 괴석 을 얹어 이마돌로 하였다. 입구를 문비석으로 막고 그 바깥으로는 막음돌을 쌓아 놓았다. 묘도는 팔자형으로 벌려서 쌓았으나 정연하지 않다. 막음돌(폐쇠석) 끝에 는 다량의 토기르 두었는데 개배와 고배류이고 개배가 대두분이다. 묘도의 남벽 끝에는 항아리 2점이 있고 약간의 철기와 칠기의 흔적이 있다. 현실은 북벽쪽이 약간 길다. 바닥은 할석으로 고르게 깔아 편평하게 하였으며 천장과 4벽은 주칠을 하였다. 이 고분은 한일 양국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전방후원형 고분으로서는 내구조가 석실로 밝혀진 국내 최초의 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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