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의 산업생산을 살펴볼 때 변진(弁辰)의 쇠가 가장 이름있었다.
이 변진의 쇠는 삼한사회는 물론 동예(東濊)와 바다 건너 멀리 왜(倭)에서도 무역을 해 갔으며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을 거쳐 중국에까지 공급되어 교역에 있어서 마치 화폐와 같이 유통하였다.
삼한시대에 변진의 쇠 생산지는 구체적으로 명기한 자료가 없으나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라 영남지방의 쇠 생산량을 살펴보면 울산의 쇠가 세공(歲貢) 생철(生鐵) 12,500근으로 가장 많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 뿐 아니라 정종 1년(1399)에 지울주사(知蔚州事) 이종주(李從周)에게 내린 왕지(王旨)에 지울주사(知蔚州事)가 울산철장관(蔚山鐵場官)까지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울산의 쇠 산출이 변진 쇠 생산의 주종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당시 세종 때의 쇠 생산을 보면 백동철(白銅鐵), 수철(水鐵), 생철(生鐵)등이 생산되고 있었다.
세종 때에 이러하였던 울산의 쇠 생산도 예종 때는 줄어들어 경상도속찬 지리지는 정철(正鐵) 479근을 세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울산의 쇠 생산도 어느 때인가 폐광 되었다가 현종(1660-1674)때에 이의립(李義立)에 의해 재발견되어 그 생산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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