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 16
천불전 일곽의 끝부분에서 돌담을 끼고 돌아서면 오른쪽에 서산대사 유물관과 그 맞은편에 있는 건물군이 표충사인데, 표충사는 서산대사(휴정)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1669년에 걸립한 사당이다.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하나인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드는 불가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공간이며 유가(儒家) 형식을 따라서 사당을 꾸며 매년 제례와 추모행사를 받들어 오고 있다.
'표충사'와 '어서각' 현판이 함께 걸린 사당 본전에는 서산, 사명, 처영대사의 영정이 봉안 되어 있고,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교지파'이 양측면 벽에 걸려 있다.
옆의 조사전에는 대흥사 역대 고승들의 영정이 있고, 표충비각에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와 '표충사건사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3채의 건물들은 독특한 문양으로 치장된 돌담안에 배열되어 있으며 그 외곽에 있는 제실건물이던 의중당(義重堂)과 부속승사인 강례제(講禮齊) 주위에는 별담을 두르고 솟을 삼문을 세워 사문(祠門)으로 삼고 있다.
사당 건물은 장대기단위에 단출하게 세운 3칸 맞배집으로 전면은 띠살 분합을 달아 출입하고, 나머지 삼면은 판벽. 표충사 현판은 정조대왕의 친필이라고 전하고 어서각은 전라우수사 신관호의 예서 글씨인 것 같다.
사당안의 '서단대사화상당명'은 당시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왕명을 받들어 써 걸어놓은 것이다.
표충사는 창건한지 48년만에 주지 설순에 의해 기둥이 부러지고 들보가 썩었다는 이유로 보수를 핑계대고 대웅전뒤로 옮겨진다. 철종 12년(1861) 대웅전을 내다보게 되어 압존(壓尊)의 흠이 있다 하여 다시 옛터인 지금의 터로 옮기게 된다.
천불전 일곽의 끝부분에서 돌담을 끼고 돌아서면 오른쪽에 서산대사 유물관과 그 맞은편에 있는 건물군이 표충사인데, 표충사는 서산대사(휴정)의 위국충정을 기리고 그의 선풍이 대흥사에 뿌리내리게 한 은덕을 추모하여 제자들이 1669년에 걸립한 사당이다.
이곳은 부처의 삼보도량 가운데 하나인 승보(僧寶)를 존중하고 받드는 불가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공간이며 유가(儒家) 형식을 따라서 사당을 꾸며 매년 제례와 추모행사를 받들어 오고 있다.
'표충사'와 '어서각' 현판이 함께 걸린 사당 본전에는 서산, 사명, 처영대사의 영정이 봉안 되어 있고,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교지파'이 양측면 벽에 걸려 있다.
옆의 조사전에는 대흥사 역대 고승들의 영정이 있고, 표충비각에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와 '표충사건사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3채의 건물들은 독특한 문양으로 치장된 돌담안에 배열되어 있으며 그 외곽에 있는 제실건물이던 의중당(義重堂)과 부속승사인 강례제(講禮齊) 주위에는 별담을 두르고 솟을 삼문을 세워 사문(祠門)으로 삼고 있다.
사당 건물은 장대기단위에 단출하게 세운 3칸 맞배집으로 전면은 띠살 분합을 달아 출입하고, 나머지 삼면은 판벽. 표충사 현판은 정조대왕의 친필이라고 전하고 어서각은 전라우수사 신관호의 예서 글씨인 것 같다.
사당안의 '서단대사화상당명'은 당시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왕명을 받들어 써 걸어놓은 것이다.
표충사는 창건한지 48년만에 주지 설순에 의해 기둥이 부러지고 들보가 썩었다는 이유로 보수를 핑계대고 대웅전뒤로 옮겨진다. 철종 12년(1861) 대웅전을 내다보게 되어 압존(壓尊)의 흠이 있다 하여 다시 옛터인 지금의 터로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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