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266-1
이 정려는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동래성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조영규와 효자로 이름난 그의 사자 조정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현종 10년(1669) 국가의 명령에 의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건물은 정려 안에 걸려 있는 현판 「위산조씨충정려중건기」에 의하면 헌종 15년(1849)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 정려 안에는 명정 표시의 두 현판이 있는데, 하나는 「 충신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행통정대부양산군수조 영규지려」라 되어 있고, 하나는「효자 증선무랑영고별검조연로지려」라 되어 있다. 무신 조영규는 중종 30년(1535)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옥담, 음보로 등용되어, 평안도 용천부사 등 여덟 고을의 원을 지냈으며 청렴결백의 목민관으로 유명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 왜란때 양산군수로서 양산성을 수비 하다가 전사하였다. 호조참의에 주증되고 양산의 충열사에 제 향되었다. 정려는 4방으로 담장이 둘러서 있고 홍살문이 설치되어 외부로부터 차단되었다.
이 정려는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동래성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조영규와 효자로 이름난 그의 사자 조정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현종 10년(1669) 국가의 명령에 의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건물은 정려 안에 걸려 있는 현판 「위산조씨충정려중건기」에 의하면 헌종 15년(1849)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 정려 안에는 명정 표시의 두 현판이 있는데, 하나는 「 충신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행통정대부양산군수조 영규지려」라 되어 있고, 하나는「효자 증선무랑영고별검조연로지려」라 되어 있다. 무신 조영규는 중종 30년(1535)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옥담, 음보로 등용되어, 평안도 용천부사 등 여덟 고을의 원을 지냈으며 청렴결백의 목민관으로 유명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 왜란때 양산군수로서 양산성을 수비 하다가 전사하였다. 호조참의에 주증되고 양산의 충열사에 제 향되었다. 정려는 4방으로 담장이 둘러서 있고 홍살문이 설치되어 외부로부터 차단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