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75-1
소쇄원 북쪽 별뫼(別山)의 높다란 동산위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 조선시대의 문인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행적과 관련되는 유적으로 송강정(松江亭), 환벽당(環碧堂)과 더불어 송강유적(松江遺蹟)으로 불린다.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을 위해 1560년(명종 15)에 창건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오른쪽에 1칸 반의 온돌방을 만들고 동쪽과 남쪽 마루는 개방하였다.
식영정이란 '그림자가 쉬고있는 정자'란 뜻이다.
임억령이 쓴 「식영정기(息影亭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그 속에 담겨있다.
"그림자는 언제나 본형을 따라 다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연법칙과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처지에 기뻐할 것이 무엇이며 슬퍼하고 성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이 외진 곳으로 들어온 것은 한갖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시원하게 바람타고 조물주와 더불어 대지위에서 어울리면서 정자이름을 식영이라고 함이 좋지 않겠는가."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환벽당에서 공부하던 동문이었기 때문에 정철은 노송의 숲속에 묻힌 이 정자의 정취와 주변경관을 즐기면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정철이 그의 나이 40세에 지은 <성산별곡>은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과 식영정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한 노래이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 조대(釣臺), 노자암, 방초주(芳草洲), 서석대(瑞石臺) 등의 승경(勝景)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광주호에 모두 잠겨 버리고 정자옆에 세워진 성산별곡 시비만 정철의 발자취를 말해 주고 있다.
정철이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하향하여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라 하여 당시에는 이 초막을 죽록정(竹錄亭)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기 위해 1770년에 다시 세우면서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지금도 정자 전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측면에 죽록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동남향인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집이며 가운데에 방이 마련되어 있고 앞과 양 옆이 마루로 꾸며져 있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그림자가 수려하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20세기 후반에 중수된 듯 보잘 것 없다.
정철은 이곳에서 한국 가사문학의 백미인<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었다. 현재 정자 옆에는 1955년에 건립한 사미인곡 시비가 있다.
정철은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1584년 여기에서 은거하다가 4년후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정치가로서의 정철은 일생동안 5번의 등극과 낙향유배를 되풀이 한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승용차]
●(송강정) 광주 두암동 정류소 → 국도 15호선을 이용, 증암천과 교차지점, 쌍교를 건너기 전 좌회전,300m지점에 위치
●(식영정) 광주 두암동 정류소→국도15호선을 따라 보촌삼거리 →지방도 826호선 고서소재지에서 우측으로 6km지점에 위치
[대중교통]
●(송강정)광주 두암동 정류소에서 담양방면 322번 군내버스 이용 쌍교에서 하차, 좌회전 100m지 점에 위치
●(식영정)광주 대인광장 출발→두암동 정류소에서 125번 시내버스(종점),225번 버스 이용. 일 16회 운행 (60분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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