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하대유적은 대대리의 하대마을에서 저리에 이르는 5개의 연속된 구릉에 이룩된 유적인데 1976년 이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수차례의 지표조사를 하여 오다가 1991년과 92년에 각각 발굴조사를 하여 어느 정도 그 성격이 규명되고 있다. 이 유적은 하대쪽에서 저리쪽으로 순차적으로 조성된 3-7세기대의 분묘유적이다. 또 한편으로 구릉지대의 평지에는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는 복합유적이며 우시산국의 여러 성격이나 문화를 규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하여 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발굴한 것은 토광목곽묘73기, 옹관묘6기, 토광묘3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2동 등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무문토기를 비롯한 연질토기와 도질토기, 철검, 철모, 철부,환두대도 같은 무기류는 물론 쇠스랑, 보습, 따비같은 농기구, 철정 등의 철기 외에 장신구 등이 나왔는데 이밖에도 청동제 솥이 출토되어 큰 주목을 끌고 있다. 이는 총고 50cm, 구경30cm, 각고(脚高)19cm, 이고(耳高)21cm,이폭(耳幅)9cm, 동체고25.5cm, 동최대경41.5cm나 되는 솥이다. 지금까지의 이 발굴은 전체유적의 일부분을 발굴하는데 지나지 않으나 이로서도 그 성과는 매우 큰 것으로 보아지며 다음과 같은 점 등이 밝혀지고 있다.
이 유적중 3세기 중엽의 대형분은 소형분에 의해 파괴를 당하고 있는 반면 3세기 후엽의 대형분은 소형분을 파괴하고 설치되어 있음은 물론 소형분에 의한 파괴현상은 보이지 않고 있다. 또 3세기 후엽의 대형분은 조망이 좋은 구릉의 정상부를 차지하고 있고 그 주위를 소형분들이 둘러싸고 있는 고분배치의 기획성이 인정되며, 이는 3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지배구조에 있어서 큰 변화를 보이는 것이라 한다. 이는 다시 말해 강력한 정치권력의 등장과 고대국가의 발생을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부장유물을 통해 보았을 때 대형급의 유물에서는 길이1m가 넘는 철검, 환두대도, 의장성이 풍부한 대형의 철모류와 직경 4.7cm 정도의 대형 수정제절자옥, 수정제 곡옥 등이 출토되거나. 대형의 S자형 경판이 붙은 재갈이 출토되는 등 의기적인 성격이 농후한 철제유물 등 많은 철기류는 물론, 보습과 쇠스랑 같은 농기구도 출토되고 있다. 또 23호분에서는 중국의 의례용기인 청동제 솥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것 등을 보았을 때 대형분의 성격은 수장급 지배계층임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철을 장악하였던 계층이었으며 또 풍부한 철을 매개로한 대외교역까지도 주도한 계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중형급의 46호분에서 오리형 토기가 나왔을 뿐 아니라 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2점의 오리형 토기도 이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46호분에서는 다량의 유자이기와 구슬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와 같은 것을 보았을 때 이 무덤의 주인공은 특수한 신분층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며 오리형 토기의 소유 또한 그렇게 추정되는 것이라 한다.
목곽분의 형태는 시기적으로 방형에서 장방형의 축조순서를 보이며, 소형분의 경우 출토유물의 내용면에서나 목곽의 세장한 형태는 부산이나 김해지역보다는 경주쪽이 더 깊은 관련성을 엿보이고 있다. 동래복천동(독로국, 거칠산국). 김해대성동 유적(금관국)의 정치집단과 비견할 만한 세력집단이 일찍 이 지역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 하며, 시기적으로도 위 두 유적보다도 다소 앞선 시기부터 형성되어 오랜 기간 존석된 매우 안정된 정치집단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대발굴을 통해 고대국가의 발생시기를 종래의 4세기에서 3세기 후반경까지 올려잡을 수 있는 자료를 얻었으며 대대리 유적은 남부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서 그규모로 보아 상당한 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진다. 또한 우시산국의 실존이나 이 나라의 치소가 규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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