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북구 덕천동
화명동 대장골의 북쪽 끝 언덕위에 화명동 고분군이, 남쪽 끝 구릉지대에 덕천동 고분군이 발굴되었는데 그 고분군이 있던 자리에 화명동 주공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화명동 고분군은 4세기 중엽의 가야시대 유적이라면 덕천동 고분군은 가야말기로부터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인 6세기경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덕천동 고분군은 1981년 1월, 대한주택공사가 아파트 부지 조성 공사중 유물들이 공사 장비에 의해 대량으로 파괴되면서 그 모습이 나타났을 때 뒤늦게 공사를 중지하고 시급히 발굴했던 유적이다.
편년상으로 보아 화명동 고분군의 연속연대로 보아지는 덕천동 고분군은 부산지역에서는 최대의 고분군이었는데도 문화재에 대한 당국의 무관심과 관련학계의 방치로 지난 날 많은 유물들이 오랜세월 동안 처참하리만치 도굴되었고 이곳이 정식 발굴되거나 보호 조치가 내리기 전에 아파트 단지 조성으로 귀중한 문화유적이 졸속 발굴된 후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처음 공사 현장의 장비들에 의해 무참하게 파 헤쳐진 현장에 도착한 발굴조사단은 이곳 덕천동고분군은 지배층 무덤이 아닌 민묘(民墓)인데다 심하게 도굴된 곳이라 출토유물에 대한 관심과 기대보다는 학술조사와 정리 발굴이라는데에 중점을 두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날 쓸모 없는 구릉지대로 버려져 있던 이곳 2천여 평의 땅에서 묘제로서는 부산·김해 지역에서 처음으로 파악된 횡구석석실묘(橫口式石室墓) 64기(基)와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 3기(基)등이 완전 형태로 발굴되는 등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이다.
덕천동고분군의 상당수가 6세기경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합장묘(合葬墓)로서 추장(追贓) 또는 가족장(家族葬)으로 밝혀졌는데 집단 고분에서 발견되기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는 4벽(壁)을 축조하고 시체를 넣은 다음 천정석(天井石)을 덮는 화명동 수혈식석실묘)와는 달리 우선 3벽을 축조하고 천장석을 덮은 뒤 나머지 한 쪽으로 시체를 넣고 밖에서 막은 형태로서 추가로 시신(屍身)을 넣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가 합장묘였음을 알려주는 것은 시사의 형태인데 자갈이나 판석을 쓴 시상이 2~3번 추가 되었음이 확실히 드러남으로써 피장자(被葬者)의 가족이나 측근을 추가로 장사할 때 시상(屍床)을 더 만들었음이 밝혀졌다.
합장(合葬)의 더욱 뚜렷한 증거로는 1차 피장자의 부장품이 2차 피장자를 안치 하기 위해 마련한 시상의 아래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어떤 고분은 합장하기에 좁았던 탓인지 후기에 묘역을 더 확장시킨 흔적도 있었다.
이는 덕천동고분군이 가족묘적 성격을 띤 합장표임을 나타낸 것으로 이러한 시설물을 부곽(副槨)으로 보는 반면에 제사 유적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부산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묘의 방향은 동서향과 남북향이 있는데 수평곡선의 방향과 일치하고 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는 깬돌로 3벽을 만든 후 두껑돌을 덮고 한쪽을 입구로 이용한 후 최종적으로 막은 것이다.
묘의 바닥은 깬돌로 한 겹, 안은 여러겹 깐 것, 중앙에만 깐 것, 한쪽에 치우쳐 깐 것 등 여러 가지 시설을 하였다.
무덤의 주위에 원형으로 돌을 돌린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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