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북구 금곡동
효자 천승호와 열녀 이씨의 효행은 1872년 나라에서 교지를 내려 금곡동에 정려비를 세운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서 양산군 유림들이 군수에게 올린 추천서에 잘 나타나 있다. 효자 천승호는 선비 집안의 전통은 이어받아 시례(詩禮)의 풍(風)과 효도를 배우지 않고도 글을 알았으며, 그 어머니가 일찍이 풍담(風痰)으로 여러 달 병에 누웠는데, 입은 옷에 띠를 풀지 않고 자리는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이리 저리 약물 물었다. 의원의 말이 "능구렁이가 가장 좋은데, 때가 겨울이니 어디서 얻겠는가!"
승호가 하늘을 부르며 물어 널리 구하니 끝내 얼음과 눈 쌓인 산에서 얻어 어머니 병이 즉시 나았다.
그후 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좋은 음식을 구할 길이 없어 송아지를 시장에 팔아 받은 돈 10꿰미를 가지고 저녁에 돌아오다가 산골에서 갑자기 산적 두 세명이 나타나 칼을 휘둘러 돈을 뺏으니, 승호가 병든 어머니 봉양할 돈이라고 지성으로 울며 간청하니 말씨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23세에 비로서 결혼하여 능히 부부의 도리를 다하여 또한 부부유별을 다하였다.
그 아내 경주 이씨는 본래 전통있는 가문의 딸로 천성이 순수하여 바탕과 행실이 정숙하며 이미 어진 부모의 훈계를 듣고 또 남편의 법도를 따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물 긷고 방아 찧고 길쌈하기 30여년에 혈기가 이미 쇠약해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절차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부지런 하였고 방이 차고 더운 문안까지 밤이나 낮이나 게으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50살에도 부모를 사모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웃 여자들이 감화되고 촌 아낙네들이 사모하고 본받아 시모 섬기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이씨를 일컬었으니, 만약 출천지효가 아니면 그 사람을 감동시키는 깊이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그 남편은 어질고도 효성스러우며 그 아내는 효도와 정렬이 겸비했으니 감영과 고을에서 미행을 포창하는 일이 거듭되지 않음이 아니나, 조정에서 효열을 드러내어 밝히는 혜택(정려각)은 아직 지금까지 받지 못했으므로, 도내 선비들의 의논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상감의 행차가 왕릉을 뵈오러 가시는 때에 사유를 갖추어 말씀을 올렸더니, "도에 조사토록 하겠노라"는 하교가 있었기에, 도대표 유자의 공의가 이미 이처럼 동의했고 본읍 사림이 침묵할 수 없었다.
이에 연명하여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참고하고 즉시 실제대로 감영에 보고하여 천승호의 지극한 효도를 포창하고, 그 처 이씨의 높은 열행을 정려 내려 조정에서 권장하는 높은 은택으로 처분해 달라는 글을 올려 나라에서 효자 열녀 정려 교지가 내려진 것이다.
효자 천승호와 열녀 이씨의 효행은 1872년 나라에서 교지를 내려 금곡동에 정려비를 세운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서 양산군 유림들이 군수에게 올린 추천서에 잘 나타나 있다. 효자 천승호는 선비 집안의 전통은 이어받아 시례(詩禮)의 풍(風)과 효도를 배우지 않고도 글을 알았으며, 그 어머니가 일찍이 풍담(風痰)으로 여러 달 병에 누웠는데, 입은 옷에 띠를 풀지 않고 자리는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이리 저리 약물 물었다. 의원의 말이 "능구렁이가 가장 좋은데, 때가 겨울이니 어디서 얻겠는가!"
승호가 하늘을 부르며 물어 널리 구하니 끝내 얼음과 눈 쌓인 산에서 얻어 어머니 병이 즉시 나았다.
그후 어머니가 학질을 앓아 좋은 음식을 구할 길이 없어 송아지를 시장에 팔아 받은 돈 10꿰미를 가지고 저녁에 돌아오다가 산골에서 갑자기 산적 두 세명이 나타나 칼을 휘둘러 돈을 뺏으니, 승호가 병든 어머니 봉양할 돈이라고 지성으로 울며 간청하니 말씨가 사람을 감동시켰다.
23세에 비로서 결혼하여 능히 부부의 도리를 다하여 또한 부부유별을 다하였다.
그 아내 경주 이씨는 본래 전통있는 가문의 딸로 천성이 순수하여 바탕과 행실이 정숙하며 이미 어진 부모의 훈계를 듣고 또 남편의 법도를 따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시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물 긷고 방아 찧고 길쌈하기 30여년에 혈기가 이미 쇠약해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절차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부지런 하였고 방이 차고 더운 문안까지 밤이나 낮이나 게으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50살에도 부모를 사모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웃 여자들이 감화되고 촌 아낙네들이 사모하고 본받아 시모 섬기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이씨를 일컬었으니, 만약 출천지효가 아니면 그 사람을 감동시키는 깊이가 어찌 이와 같겠는가?
그 남편은 어질고도 효성스러우며 그 아내는 효도와 정렬이 겸비했으니 감영과 고을에서 미행을 포창하는 일이 거듭되지 않음이 아니나, 조정에서 효열을 드러내어 밝히는 혜택(정려각)은 아직 지금까지 받지 못했으므로, 도내 선비들의 의논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상감의 행차가 왕릉을 뵈오러 가시는 때에 사유를 갖추어 말씀을 올렸더니, "도에 조사토록 하겠노라"는 하교가 있었기에, 도대표 유자의 공의가 이미 이처럼 동의했고 본읍 사림이 침묵할 수 없었다.
이에 연명하여 우러러 하소연하오니 참고하고 즉시 실제대로 감영에 보고하여 천승호의 지극한 효도를 포창하고, 그 처 이씨의 높은 열행을 정려 내려 조정에서 권장하는 높은 은택으로 처분해 달라는 글을 올려 나라에서 효자 열녀 정려 교지가 내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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