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에 축조된 벽골제는 유구한 역사와 함께 숱한 사연들이 얽혀져 내려오고 있는 가운데, 특히 쌍용놀이가 이 지방 용골부락에서 전래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벽골제방으로부터 200m하류 지점의 신털미산 북단에 용추가 있는데, 이 용추에는 백룡이 점거하면서 백골제를 수호했다하여 일명 벽골용으로 칭하게 되었고, 또 하나는 벽골제 중간 제방아래 약 100m 하류지점, 즉 김제시 부량면 용골부락 남단을 흐르고 있는 연포내에 있는 용추에 청용이 살고 있으면서 아주 심술사나운 짓만 했다고 한다. 이 두 개의 용추를 쌍용추라 하며, 백용과 청용응 쌍용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백용은 온순하고 제방에 피해를 주지않고, 인가에도 손해를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방이나 인가를 수호하는 뜻에서 풍우변란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온 반면에, 청용은 본시 성품이 포악하고 심술꾸러기이어서 이따금 풍우난작을 일으켜 제방에도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인근의 가옥인명까지도 해치고 있었다. 이에 이웃에 살고 있는 백용의 충고도 듣지 않고 난폭한 행동이 계속되어 끝내는 쌍용의 싸움으로까지 이어져 백용이 패퇴하자 청용은 마음놓고 둑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수만 장정이 사력을 다하여 쌓은 벽골제를 수호함으로써 금만평야의 풍년을 기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단야(김제 태수의 딸)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은 단야의 갸륵한 넋을 기리는 민속놀이가 지금도 해마다 벽골문화제전의 주요행사로 거행되고 있다.
벽골제쌍룡놀이 - 단야의 갸륵한 넋을 기리는 민속놀이
백제시대에 축조된 벽골제는 유구한 역사와 함께 숱한 사연들이 얽혀져 내려오고 있는 가운데, 특히 쌍용놀이가 이 지방 용골부락에서 전래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벽골제방으로부터 200m하류 지점의 신털미산 북단에 용추가 있는데, 이 용추에는 백룡이 점거하면서 백골제를 수호했다하여 일명 벽골용으로 칭하게 되었고, 또 하나는 벽골제 중간 제방아래 약 100m 하류지점, 즉 김제시 부량면 용골부락 남단을 흐르고 있는 연포내에 있는 용추에 청용이 살고 있으면서 아주 심술사나운 짓만 했다고 한다. 이 두 개의 용추를 쌍용추라 하며, 백용과 청용응 쌍용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백용은 온순하고 제방에 피해를 주지않고, 인가에도 손해를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방이나 인가를 수호하는 뜻에서 풍우변란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온 반면에, 청용은 본시 성품이 포악하고 심술꾸러기이어서 이따금 풍우난작을 일으켜 제방에도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인근의 가옥인명까지도 해치고 있었다. 이에 이웃에 살고 있는 백용의 충고도 듣지 않고 난폭한 행동이 계속되어 끝내는 쌍용의 싸움으로까지 이어져 백용이 패퇴하자 청용은 마음놓고 둑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수만 장정이 사력을 다하여 쌓은 벽골제를 수호함으로써 금만평야의 풍년을 기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단야(김제 태수의 딸)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은 단야의 갸륵한 넋을 기리는 민속놀이가 지금도 해마다 벽골문화제전의 주요행사로 거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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