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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 - 소치 허련이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51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쌍계사 서북쪽에 위치한 정통 남화의 맥을 이룬 조선말의 남화가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8∼1893)이 말년에 거처하던 화실의 당호이다.

소치는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으로 1808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밍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후에 유(維)로 개명하여 중국 당나라 남종화와 수묵산수화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땄으며 호는 소치(小痴)로 원나라의 4대 화가의 한사람인 황공망을 대치라 한데 대하여 김정희가 붙여준 호이다.

소치는 어려서부터 그림재주가 있어 28세때부터 두륜산방(현 대흥사)의 초의선사(草衣禪師, 張意恂, 1786∼1866) 밑에서 공재 윤두서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하게 된다.
41세 되던 1847년 7월 낙선제에서 헌종 앞에서 그림솜씨를 보인 게 인연이 되어 신관호(申觀浩), 정학연(丁學淵), 민승호(閔升鎬), 민영익(閔泳翊), 이하응(李昰應)과도 교류를 나누게 된다.

초년의 윤두서(尹斗緖) 작품을 통해 익힌 전통기법은 기정희로부터 원말의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북송의 미불, 청나라의 석도(石濤) 등을 배우고 그의 서풍도 전수 받으면서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진도에 귀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여생을 보냈다.
소치는 다방면에 능통하지만 산수화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다.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 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붓끝이 갈라진 거친 독필(禿筆)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생편한 담채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산수화 외에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사군다. 모란, 파초, 괴석, 노송, 연화그림도 특징적인 개성미를 지녔다.

그의 화풍은 아들 형(灐, 米山, 1862∼1938) - 손자 건(楗, 南農, 1908∼1988) 방계인 허백련(許百鍊, 毅齊, 1891∼1977)등에게 이어져 가히 한국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민영익은 소치를 서화에 뛰어났다고 '묵신'으로 불렀으며 정건조는 여기에 문명(文明)을 더하여 삼절(三節)이라 하였다.
근처에 소치기념관이 있어 3대에 걸친 작품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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