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암군 신북면 장산리 403
영팔정은 조선 초 전라도관찰사로 부인함 하정 유관(1346~1433)이 현 저산리의 지세와 경관이 좋아 세거지로 택하고, 그의 아들 맹문에게 명하여 1406년(태종 6)에 건립하게 한 정자이다. 유관은 조선개국공신으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태조실록』 을 편찬하는데 참여했고, 1424년(세종 6)에 『고려사』를 찬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이다. 초창 당시의 정호는 나주목사 유두명이 마을이름인 저산의 '저'자와 유관의 호인 하정의 '정'자를 따서 '저정'이라 칭하였다. 그후 율곡 이이(1536~1584)가 이곳에 와서 유관의 학덕을 기리면서 주변경관을 팔경시로 읊었으며, 그 뒤에 고경명·남이공·유상운 등이 팔경시를 연작하였던 곳이라 하여 '영팔정'으로 바뀌었다. 현재 규모로의 중건은 영의정을 지냈던 약재 유상운 (1636~1707)에 의해 1689년(숙종 15)에 이뤄졌다. 그 후의 중 ·개수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한편 영팔정과 직접 관련된 유물로는 정자내부에 보관된 제 영·기문현판과 동계책이 있다. 제영문은 율곡 이이와 재봉 고경명·약재 유상운 등의 『저산팔경』『저산정기』(1692년 유상경찬)『상계문』(1689년 유상운찬)과 주련 4개가 있다.「 영팔정」현판은 남구만(1629~1711)의 글씨이며,『동계책』2책 (1611년, 1707년)에 게원안과 완의(추약)가 첨부되어 있다. 또한 연관유적으로는 영팔정과 인접한 곳에 저산리 문화유씨 문중 소유의 분비재(1643년 건립, 유중의 재실)와 죽봉사 (1796년 건립, 유상운사당)가 있고 마을입구에는 유관의 신도비가 있다. 영팔정은 조선초기에 건립된 정자로 오랜 세월동안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사정으로서의 역할은 몰론 강학의 장소, 향약의 집합소로도 이용되어 마을의 구심체가 되었던 곳이다. 또한 현전하는 '저산동약'은 지방사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주목된다.
영팔정은 조선 초 전라도관찰사로 부인함 하정 유관(1346~1433)이 현 저산리의 지세와 경관이 좋아 세거지로 택하고, 그의 아들 맹문에게 명하여 1406년(태종 6)에 건립하게 한 정자이다. 유관은 조선개국공신으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태조실록』 을 편찬하는데 참여했고, 1424년(세종 6)에 『고려사』를 찬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된 인물이다. 초창 당시의 정호는 나주목사 유두명이 마을이름인 저산의 '저'자와 유관의 호인 하정의 '정'자를 따서 '저정'이라 칭하였다. 그후 율곡 이이(1536~1584)가 이곳에 와서 유관의 학덕을 기리면서 주변경관을 팔경시로 읊었으며, 그 뒤에 고경명·남이공·유상운 등이 팔경시를 연작하였던 곳이라 하여 '영팔정'으로 바뀌었다. 현재 규모로의 중건은 영의정을 지냈던 약재 유상운 (1636~1707)에 의해 1689년(숙종 15)에 이뤄졌다. 그 후의 중 ·개수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한편 영팔정과 직접 관련된 유물로는 정자내부에 보관된 제 영·기문현판과 동계책이 있다. 제영문은 율곡 이이와 재봉 고경명·약재 유상운 등의 『저산팔경』『저산정기』(1692년 유상경찬)『상계문』(1689년 유상운찬)과 주련 4개가 있다.「 영팔정」현판은 남구만(1629~1711)의 글씨이며,『동계책』2책 (1611년, 1707년)에 게원안과 완의(추약)가 첨부되어 있다. 또한 연관유적으로는 영팔정과 인접한 곳에 저산리 문화유씨 문중 소유의 분비재(1643년 건립, 유중의 재실)와 죽봉사 (1796년 건립, 유상운사당)가 있고 마을입구에는 유관의 신도비가 있다. 영팔정은 조선초기에 건립된 정자로 오랜 세월동안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사정으로서의 역할은 몰론 강학의 장소, 향약의 집합소로도 이용되어 마을의 구심체가 되었던 곳이다. 또한 현전하는 '저산동약'은 지방사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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