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322
임실 오수의 의견비에 대해서는 고려 고종때 최자(<崔滋> :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1천년전에 지사면 영천리에 김개인<金蓋仁>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개 한 마리가 있어 언제나 데리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는 장날이 되어 여느 때처럼 개를 데리고 갔다. 장에서 친구들을 만난 개인은 친구들이 권하는 술잔을 뿌리치지 못하고 주는 대로 술을 마시니 몹씨 취하였다. 이러한 상태로 개와 함께 집에 돌아 오다 잔디밭에 누워 그만 잠이 들었다. 얼마후 인군에서 불이 나 개인이 누운 곳 가까이 불길이 번지자 개는 주인을 깨우려고 짖기도 하고 입으로 물기도 하였으나, 술에 취한 채 잠이 든 주인은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개는 할수 없이 냇가에 몸을 적시어 주인이 누워 자는 주위의 풀에 물기를 적시기 시작하였다. 수없이 이처럼 반복하여 주위의 풀에 물기를 배게 하여 불길은 잡았으나, 개는 기운이 쇠진하여 쓰러져 죽고 말았다. 개인이 주위가 싸늘하여 깨어 보니 불길은 멈추고 개가 죽은 것을 보고 자기를 위해 한 일을 가상히 여겨 노래를 지어 슬픔을 달래고 무덤을 만들어 장사지낸 뒤, 자기의 지팡이를 세워 표지를 삼았더니 그것이 나무로 살아나 성장하였다. 이후 사람이 모여 동네를 이루게 되니 이 나무를 오수<獒樹>라 하고, 마을 이름 역시 오수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악보 가운데의 견분곡<犬墳曲>이 이것이다. 뒤에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사람이 축생<畜生>으로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면서 공연히 큰 은혜를 저버리고는 한다. 주군<主君>이 위태할 때 죽지 않는다면 어찌 개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하고 하였다. 후에 동네사람들은 김개인 개의 충성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의견비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의 풍파로 글씨마저 마멸되어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의 의견비는 1955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서, 비각을 세우고 주위를 단장하여 원동산<園動山>이라는 공원을 꾸미는 일주문까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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