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432-1
장동사는 본래 임진공신 정몽성(1561~1597)을 추모하기 위하여 1677년(숙종 3)에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장동 마을에 창건한 사우이다. 그후 1706년(숙종 32)에 사우를 중수하면서 전몽진을 추배하고 뒤이어 1836년(헌종 2)에 전몽태(1571~?)를 또 추배하여 현재 3형제를 배향하고 있다. 1706년에 1차 중수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46년에 향내유립의 발의로 현 소재지 인 엄길리(엄길마을)에 이건 복설하였다.(천안전씨대동보에는 1685년에 도유들에 의해 전몽성이 향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주벽인 전몽성은 임란시 초토사 고경명의 막하에서 금산의 적을 토벌하였으며, 함평현감을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동생 몽진과 함께 창의하여 율치에서 대승하고, 다시 월출산으로 이진하여 장흥·영암·강진 등지 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다가 순절하니 이에 선조는 "임란항의 위국손생"이라는 8 글자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몽 태는 1624(인조 2) 이괄의 란이 발생하자 표기 김완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현재 장동사는 정면 삼간, 측면 이간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내부에는 『천안전씨문안』(1책), 『 장동사청금안』(9책)등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관련유적이 있는데 제실고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충신 전모성·몽진과 효 자 전몽태의 지극한 충효사상을 기리기 위햐여 1887년(고종 24) 명정을 받아 건립한 충효문, 그리고 전몽석·몽태의 신도비 2기가 있다.
장동사는 본래 임진공신 정몽성(1561~1597)을 추모하기 위하여 1677년(숙종 3)에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장동 마을에 창건한 사우이다. 그후 1706년(숙종 32)에 사우를 중수하면서 전몽진을 추배하고 뒤이어 1836년(헌종 2)에 전몽태(1571~?)를 또 추배하여 현재 3형제를 배향하고 있다. 1706년에 1차 중수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46년에 향내유립의 발의로 현 소재지 인 엄길리(엄길마을)에 이건 복설하였다.(천안전씨대동보에는 1685년에 도유들에 의해 전몽성이 향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주벽인 전몽성은 임란시 초토사 고경명의 막하에서 금산의 적을 토벌하였으며, 함평현감을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동생 몽진과 함께 창의하여 율치에서 대승하고, 다시 월출산으로 이진하여 장흥·영암·강진 등지 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다가 순절하니 이에 선조는 "임란항의 위국손생"이라는 8 글자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몽 태는 1624(인조 2) 이괄의 란이 발생하자 표기 김완을 도와 공을 세워 진무원종훈에 기록되었다. 현재 장동사는 정면 삼간, 측면 이간의 맞배지붕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내부에는 『천안전씨문안』(1책), 『 장동사청금안』(9책)등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관련유적이 있는데 제실고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충신 전모성·몽진과 효 자 전몽태의 지극한 충효사상을 기리기 위햐여 1887년(고종 24) 명정을 받아 건립한 충효문, 그리고 전몽석·몽태의 신도비 2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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