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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남해당지 - 영암 남해당지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산 1005

전남의 통일신라때 국제터는 월출산과 완도·청해진 둘뿐이었으나 고려때 지리산이 국제대상이 되었고 1028년(현종 8)에 남해신사, 삼별초 토평후인 1273년(원종 14)에는 무등산, 1277년(충열왕 3)에 나주 금성산신이 국제에 올랐다. 이중 영암의 남해신제는 고려 때 가장먼저 국제에 올랐으며 단이 아니라 묘당으로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나주목 산천조>에 해남신사는 나주 남쪽 45리에 있고 기전에 중기로 기록되었으며 춘추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예고>에서는「고려 현종19년(1028) 남해 신을 기전에 올렸다. 정안현(지금의 장흥)에서 산호수를 바쳤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여 처음 시작된 연대를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에 산신은 지리산(남), 삼각산(중), 송 악산(서), 비백산(북일정평) 등의 네 군데가 있었고, 해의 동해 신은 양양, 남해신은 나주, 서해신은 풍천등 세곳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곳 남해당제는 시종면 신연리 조정현(80세)옹에 따르면 한일합병까지 나주목하(군수)가 헌관이 되어 재를 올렸으나 망국와 더불어 폐지되었다 한다. 1925년 김현재가 이 일대를 사들여 당집 터에 그의 아버지를 장사지냈으나 집안이 몰 락하는 비운을 겪었다고 한다. 이 당 터는 3단계로 정지되어 있는데 북쪽 상단에 2기의 고인 돌(지석묘)이 자리잡고 있고 중단 중앙에 민 묘가 들어서 있으며 하단은 잡초가 우거져 있다. 각계의 높이는 2m가량이고 서쪽에 제직이 집이 있었고 남쪽 하단에 대문 및 4칸집이 양쪽에 대칭적으로 자리하고있었다 한다. 산 1005 번지 1천여 평냉 담장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동족 담장에 대문이 있었으며 대분과 제관방 ~ 제당 사이에는 중앙 통로가 있었다고 한 다. 당제의 풍습은 지금도 많이 전하고 있지만 왕조시대의 국제 풍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국제의 흔적으로는 강화도 마니산 제단 정도이고 지리산 산신제는 구례 약수제 정도가 남아 있다. 영암의 남해신당은 국내 해신당 중 남한 유일의 제 터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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