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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보정 - 영보정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296

영보정은 조선초기의 문인이며 학자인 연촌 최덕지(1834~1455)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현재의 영보촌에 우거하면서, 그의 사위 신후경과 함께 전주최씨·거창신씨 문족의 합력으로 건설한 정자이다. 초창의 연대나 규모는 불명확하고 현재의 위치에 중건된 것은 연촌의 7세손인 최정(1568~1639)이 거창신씨 문중의 신천익(1592~1661)과 함께 재건한 것으로 두 사람의 생몰년대로 보아 163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촌 최덕지는 1405년(태종 5)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주군을 다스리고 남원부사를 역임한 뒤 영보촌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향인과 후손을 교화하였다. 1450년(문종 원 년)에 에문관직제학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문종은 영정과 유지초본(보물 제594호)을 하사하였고 동료 문인이었던 성삼문·이치·박팽년·유성원 등 이 시부를 지어 덕을 칭송하였다. 시호는 문숙이며 『연촌유집』이 있다. 한편 영보정과 관련된 유물·유적으로는 전주최씨와 거창신 씨 문족이 중심이 되어 창설된 『영보정동계자료』8책이 전 해오고 있는데 이들 자료들은 조선후기 영암지방 말단 향촌 사회의 생생한 생활사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다음으로 최·신 양문족의 합력을 바탕으로 이룩한 ①연촌영당(영정;보물594호) ②목판각 ③함경재(영암지방 유일의 사액 서원인 녹동서원 관련문서 일절보관) ④연촌 최덕지의 고택 ⑤재양루 ⑥신후경 고택(중요민속자료 164호) 등이 인접하여 더욱 역사적 가치가 크다하겠다. 1630년대에 현재의 규모로 완성된 영보정은 그 후 부분적인 중·개수를 거쳐 한말까지 유지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이 영보정에 영보학원(1921)이 설립되어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 정신을 배양하기도 하였다. 영암청년들의 항일투쟁으로 손꼽히는 1931년「형제봉 만세운동」도 실은 이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졸업생 및 청년회원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영보정은 신교육과 구국정신을 함양한 학사로써 이 지방민들에게 의미가 큰 유적이며, 현재도 마을민들의 구 심체로서 매년 5월 5일에 풍향제라는 마을 축제가 영보정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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