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산 22-4
강항은 일본에 주자학을 전한 이조 때의 학자로 자는 태초, 호는 수은으로 강희맹의 5대 손이다. 명종 22년 정묘(1567)에 영광군 불갑면 서봉리에서 출생, 선조 26년(159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서관 박사,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성우계의 문하생으로 그의 학문적 계보는 이퇴계의 직계다. 경서와 사기에 능했으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조 30년 정유(1597년)에 왜군이 고향에 침입하자 이충무공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왜군을 만나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아들용과 가족이 모 두 잡혀 아들과 딸이 죽고 같이 포로가 된 다른 몇 사람과 일 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은 적국에서 포로의 몸으로 있으면서도 일본의 지도와 견문을 적어 비밀리에 인편으로 국내에 보내 그의 나라 위한 충절을 보여 주었다. 또 당시 왜승인 순수좌와 경안은 강항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여 교제가 깊었으며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특히 순수좌는 후 에 유학자로 전향하여 일본유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강항은 선조 33년(1600)에 일본을 떠나 조국에 돌아와 순 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나라에 죄가 많다하여 사양하고 고향에서의 여생을 후진양성으로 마쳤으니 그의 고고한 인품을 알 수 있다. 현 내산 서원은 인조 13년(1635) 나라에서 용 계사라 사액되었고 숙종 28년(1702)에 동사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주는 정면 삼간, 측면 이간의 맞배집으로 아담하고 고졸한 규모를 지녔으며 서원은 정면 사간, 측면 삼간, 팔작지붕이다. 회삼문은 근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수은 집』이 있는데 모두 6권 4책으로 이의 편찬은 그가 떠난 지 40 년이 지난 효종 9년(1658)에 제자 윤순거에 의해 이뤄졌다. 현재 한글로 번역된 『간양록』은 그 저서 중 일부로 본시 『진거록』이라 한 것을 전한시 중랑장소무를 연유로 해서 편찬 시 『간양록』이라 고쳤다 한다.
강항은 일본에 주자학을 전한 이조 때의 학자로 자는 태초, 호는 수은으로 강희맹의 5대 손이다. 명종 22년 정묘(1567)에 영광군 불갑면 서봉리에서 출생, 선조 26년(159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서관 박사,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성우계의 문하생으로 그의 학문적 계보는 이퇴계의 직계다. 경서와 사기에 능했으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조 30년 정유(1597년)에 왜군이 고향에 침입하자 이충무공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왜군을 만나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아들용과 가족이 모 두 잡혀 아들과 딸이 죽고 같이 포로가 된 다른 몇 사람과 일 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은 적국에서 포로의 몸으로 있으면서도 일본의 지도와 견문을 적어 비밀리에 인편으로 국내에 보내 그의 나라 위한 충절을 보여 주었다. 또 당시 왜승인 순수좌와 경안은 강항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여 교제가 깊었으며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특히 순수좌는 후 에 유학자로 전향하여 일본유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강항은 선조 33년(1600)에 일본을 떠나 조국에 돌아와 순 천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나라에 죄가 많다하여 사양하고 고향에서의 여생을 후진양성으로 마쳤으니 그의 고고한 인품을 알 수 있다. 현 내산 서원은 인조 13년(1635) 나라에서 용 계사라 사액되었고 숙종 28년(1702)에 동사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주는 정면 삼간, 측면 이간의 맞배집으로 아담하고 고졸한 규모를 지녔으며 서원은 정면 사간, 측면 삼간, 팔작지붕이다. 회삼문은 근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수은 집』이 있는데 모두 6권 4책으로 이의 편찬은 그가 떠난 지 40 년이 지난 효종 9년(1658)에 제자 윤순거에 의해 이뤄졌다. 현재 한글로 번역된 『간양록』은 그 저서 중 일부로 본시 『진거록』이라 한 것을 전한시 중랑장소무를 연유로 해서 편찬 시 『간양록』이라 고쳤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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