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군 대마면 원흥리 272-103
조선 선조 정유재란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의 동래·진주 양정씨문중 10여명의 부인들은 왜적의 추격을 받자 현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까지 피신하다 적선을 만나자 함평에 명 정된 8부녀와 도외 출신 4부녀는 정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따라서 진주문중 정박의 처 박씨 부인은 동시·동장소는 아니나 왜적들에게 잡혀 대마도를 향 해 항해중 남해 앞 바다에서 순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함평의 8부녀는 숙종 7년(1681) 나라에서 국포명정하여 정려를 건립하였으나 진주정씨 정박의 부인 박씨는 1872년 경 (고종 9) 당시 전라도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친가인 영광군 함산면 죽동에 정려가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6·25의 피해로 유적이 소실되면서 후손들이 1960년 현위치에 석조비 각을 중건한 것이다. 정려는 오곽으로 목조비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그 안에 석조 비각이 있는데 4개의 석주를 세워 그 위로 팔작형 옥개석을 올렸다 총높이 2.3m의 비각안에는 대리석으로 된 정려현판과 중건기가 정면과 측면, 배면에 각 부착되어 있다. 우측에는 중 건기가 기록된 현판(36×45.5cm, 두께 2cm)인데 제목은「선조 비공인박씨정려중건기」라 하고 후면에「기해유하휴손유탁주 형근서」라 하여 1960년 현위치로 정려를 옮기면서 쓴 중건기 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배면에 있는 현판(30×98cm, 두께 11cm)은 양편의 석주에 끼워 놓았는데, 역시 제액은「열부박 공인씨정려중건기」라 명문하고 맨 후미에「덕은송재성근기」라하였다. 이 중건기는 연대를 명기해 두지 않아 어느 때 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조선 선조 정유재란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의 동래·진주 양정씨문중 10여명의 부인들은 왜적의 추격을 받자 현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까지 피신하다 적선을 만나자 함평에 명 정된 8부녀와 도외 출신 4부녀는 정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따라서 진주문중 정박의 처 박씨 부인은 동시·동장소는 아니나 왜적들에게 잡혀 대마도를 향 해 항해중 남해 앞 바다에서 순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함평의 8부녀는 숙종 7년(1681) 나라에서 국포명정하여 정려를 건립하였으나 진주정씨 정박의 부인 박씨는 1872년 경 (고종 9) 당시 전라도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친가인 영광군 함산면 죽동에 정려가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6·25의 피해로 유적이 소실되면서 후손들이 1960년 현위치에 석조비 각을 중건한 것이다. 정려는 오곽으로 목조비각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그 안에 석조 비각이 있는데 4개의 석주를 세워 그 위로 팔작형 옥개석을 올렸다 총높이 2.3m의 비각안에는 대리석으로 된 정려현판과 중건기가 정면과 측면, 배면에 각 부착되어 있다. 우측에는 중 건기가 기록된 현판(36×45.5cm, 두께 2cm)인데 제목은「선조 비공인박씨정려중건기」라 하고 후면에「기해유하휴손유탁주 형근서」라 하여 1960년 현위치로 정려를 옮기면서 쓴 중건기 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배면에 있는 현판(30×98cm, 두께 11cm)은 양편의 석주에 끼워 놓았는데, 역시 제액은「열부박 공인씨정려중건기」라 명문하고 맨 후미에「덕은송재성근기」라하였다. 이 중건기는 연대를 명기해 두지 않아 어느 때 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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