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868
석창성의 위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치소자리이다. 즉 백제 때에는 구지하성원촌현의 치소가 되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해읍현으로 고쳐졌다가 고려말 공민왕 때에 이르러 현령을 두면서 창고와 성곽을 쌓은 것이 석창성의 유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석창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주일천사백칠십 구척 고심척 내유삼정」이라하였다. 그 규모는 성둘레가 716m에 불과한 거형의 작은 성곽인데 흡성형태로 평지에 견고하게 축성되었다. 문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 서남에 그 유지가 있다 성내의 건물 지는 모두 훼철된 후 초석을 빼내고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성벽은 치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동북우의 동쪽 성벽을 제외 하고는 1~2.5m의 높이로 성벽이 남아 있다. 이 석창성도 간척사업에 성돌이 헐려 나갔다. 그러나 성벽으 해자자리는 논에서 역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성가퀴는 훼손되었으나 성벽 은 비교적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석창성과 이웃하여 오낭산성, 여수산성, 봉계산지가 있는데 여수성은 선조 25년(1592)에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 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대비하고 축성한 성으로전하므로 석창 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유적이다. 석창성은 순천도호부와 전라좌수영의 위치 변화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군영이 돌산포로 옮겨간 후 치소로서만 남게 된 듯하다. 이와 같이 석창성은 군사제도와 지방행정제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석창성의 위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치소자리이다. 즉 백제 때에는 구지하성원촌현의 치소가 되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해읍현으로 고쳐졌다가 고려말 공민왕 때에 이르러 현령을 두면서 창고와 성곽을 쌓은 것이 석창성의 유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석창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주일천사백칠십 구척 고심척 내유삼정」이라하였다. 그 규모는 성둘레가 716m에 불과한 거형의 작은 성곽인데 흡성형태로 평지에 견고하게 축성되었다. 문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 서남에 그 유지가 있다 성내의 건물 지는 모두 훼철된 후 초석을 빼내고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성벽은 치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동북우의 동쪽 성벽을 제외 하고는 1~2.5m의 높이로 성벽이 남아 있다. 이 석창성도 간척사업에 성돌이 헐려 나갔다. 그러나 성벽으 해자자리는 논에서 역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성가퀴는 훼손되었으나 성벽 은 비교적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석창성과 이웃하여 오낭산성, 여수산성, 봉계산지가 있는데 여수성은 선조 25년(1592)에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 사가 되어 임진왜란을 대비하고 축성한 성으로전하므로 석창 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유적이다. 석창성은 순천도호부와 전라좌수영의 위치 변화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군영이 돌산포로 옮겨간 후 치소로서만 남게 된 듯하다. 이와 같이 석창성은 군사제도와 지방행정제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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