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산 14
이 정려비< 旌閭碑 >가 위치한 고아읍< 高牙邑 > 원호리< 元湖里 >(들성)는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300여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로서 전근대 사회에서는 주로 선산< 善山 > 김씨< 金氏 >들의 세거지< 世居地 >였다. 1970년대 후반이래 구미< 龜尾 >공단의 발전으로 인해 도시지역의 확장과 더불어 외지인< 外地人 >의 입거< 入居 >가 심하게 일어나고 농촌지역이 도시지역으로 급격하게 변모되고 있다. 이 정려비는 임진왜란 때에 상주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전몰한 사근도찰방< 沙斤道察訪 >(함양< 咸陽 > 지역) 김종무< 金宗武 >(1548-1592)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가 1675년(숙종 1)에 충신< 忠臣 >으로 정표< 旌表 > 하면서 건립한 비석 및 비각이다. 비문의 내용은 “충신김종무지려< 忠臣金宗武之閭 > ”이고, 현판의 내용은 김종무의 임란 시의 전공과 1675년(숙종 1) 이래의 정표< 旌表 >및 상주< 尙州 > 충렬사에의 배향, 중직 등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주인공인 김종무는 대사간 김취문< 金就文 >(1509-1570)의 장자< 長子 >이고, 유성룡< 柳成龍 >의 말부< 말夫 >로서 1591년(선조 24) 오수도찰방< 獒樹道察訪(남원< 南原 >)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근도찰방< 沙斤道察訪 >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임진왜란의 발발로 인한 후퇴의 행렬에서 상주지역에서 순변사< 巡邊使 > 이일< 李鎰 >의 예하에 들어가 상주판관< 尙州判官 > 권길< 權吉 >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상주< 尙州 > 북천< 北川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공으로 인해 1675(숙종 1) 충신으로 정표되고 그의 향리에 정려각이 건립되고 정려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1721(경종 1)에는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또 1790년(정조 14)에는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남강서원< 南岡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1871(고종 8)에는 다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정려각은 1896년(고종 33)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비 및 정려각은 1675년(숙종 1)에 건립된 것으로서, 그 중 정려각은 1896년(고종 33)에 중건되었지만 원형< 原形 >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들 문화재는 형식 및 내용면에 있어서는 특별히 주목되는 바는 없지만, 김종무의 임진왜란 시의 전공 및 그와 유사한 전공이 있는 인물들의 비석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여 문화재로서 지정하여 보존하였으면 한다.
이 정려비< 旌閭碑 >가 위치한 고아읍< 高牙邑 > 원호리< 元湖里 >(들성)는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300여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로서 전근대 사회에서는 주로 선산< 善山 > 김씨< 金氏 >들의 세거지< 世居地 >였다. 1970년대 후반이래 구미< 龜尾 >공단의 발전으로 인해 도시지역의 확장과 더불어 외지인< 外地人 >의 입거< 入居 >가 심하게 일어나고 농촌지역이 도시지역으로 급격하게 변모되고 있다. 이 정려비는 임진왜란 때에 상주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전몰한 사근도찰방< 沙斤道察訪 >(함양< 咸陽 > 지역) 김종무< 金宗武 >(1548-1592)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가 1675년(숙종 1)에 충신< 忠臣 >으로 정표< 旌表 > 하면서 건립한 비석 및 비각이다. 비문의 내용은 “충신김종무지려< 忠臣金宗武之閭 > ”이고, 현판의 내용은 김종무의 임란 시의 전공과 1675년(숙종 1) 이래의 정표< 旌表 >및 상주< 尙州 > 충렬사에의 배향, 중직 등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주인공인 김종무는 대사간 김취문< 金就文 >(1509-1570)의 장자< 長子 >이고, 유성룡< 柳成龍 >의 말부< 말夫 >로서 1591년(선조 24) 오수도찰방< 獒樹道察訪(남원< 南原 >)에 임명되었다가 곧 사근도찰방< 沙斤道察訪 >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임진왜란의 발발로 인한 후퇴의 행렬에서 상주지역에서 순변사< 巡邊使 > 이일< 李鎰 >의 예하에 들어가 상주판관< 尙州判官 > 권길< 權吉 >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상주< 尙州 > 북천< 北川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공으로 인해 1675(숙종 1) 충신으로 정표되고 그의 향리에 정려각이 건립되고 정려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1721(경종 1)에는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또 1790년(정조 14)에는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남강서원< 南岡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1871(고종 8)에는 다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정려각은 1896년(고종 33)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비 및 정려각은 1675년(숙종 1)에 건립된 것으로서, 그 중 정려각은 1896년(고종 33)에 중건되었지만 원형< 原形 >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들 문화재는 형식 및 내용면에 있어서는 특별히 주목되는 바는 없지만, 김종무의 임진왜란 시의 전공 및 그와 유사한 전공이 있는 인물들의 비석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여 문화재로서 지정하여 보존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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