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남통동 249
이 채미정은 고려말< 高麗末 >의 충신이며 대학자인 야은< 冶隱 > 길재< 吉再 > 선생의 충절< 忠節 >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조선< 朝鮮 > 영조< 英祖 > 44년(1768)에 건립된 것이다. 야은 선생은 고려가 망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했으므로 중국의 백이< 伯夷 >·숙제< 叔齊 >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 故事 >에서 이름을 따 '채미정'이라 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중앙 한 칸에 방을 만들고 사방을 마루로 한 특이한 정자이다. 야은 선생은 고려 공민왕< 恭愍王 > 2년(1353)에 출생하여 우왕< 禑王 > 12년(1386) 문과< 文科 >에 급제하고, 성균관박사< 成均館博士 >를 거쳐 문하주서< 門下注書 >에 올랐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되자 태상박사< 太常博士 >의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선산< 善山 >에 은거하여 절의< 節義 >를 지켰다. 선생이 세종< 世宗 > 원년(1419) 67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 忠節 >이란 시호< 諡號 >를 내렸다. 후세 사람들은 목은< 牧隱 >, 이색< 李穡 >, 포은< 圃隱 > 정몽주< 鄭夢周 > 선생과 함께 고려의 삼은< 三隱 >이라 일컬어 높은 충절과 고매한 학덕< 學德 >을 추모하였다. 이곳에는 채미정 이외에 선생의 충절을 읊은 숙종< 肅宗 >(1671∼1720)의 어필< 御筆 > 오언시< 五言詩 >가 경모각< 敬慕閣 >에 보존되어 있고, 구인재< 求仁齋 >와 비각< 碑閣 > 등 건물이 있다. 이들 유적이 오랜 세월에 퇴락되고 황폐하여 1977년 정부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