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시 장천면 상장1리 산 42-2
이 산성< 山城 >은 신라< 新羅 >의 시조< 始祖 > 박혁거세< 朴赫居世 >가 처음 쌓고, 곽재우< 郭再祐 >(1552∼1617) 장군< 將軍 >이 왜적을 맞아 싸웠다고 전해오는 유서깊은 곳이다. 이 성은 천연적으로 형성된 험준한 암벽의 사이를 자연할석< 自然割石 >을 이어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형식대로 쌓았다. 둘레가 1km를 넘고 성안이 넓으며 우물 하나와 연못 2개가 있었다. 이웃한 금오산성< 金烏山城 >이나 가산산성< 架山山城 >과 더불어 의각< 椅角 >의 형세를 이루어 옛 인동현< 仁同縣 >의 읍민< 邑民 >을 난리로부터 보호하여 왔던 곳이다. 현재의 성벽과 문터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으로 새로이 이 성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수축되어 선조< 宣祖 > 29년(1596) 현감< 縣監 > 이보< 李輔 >에 의해 고쳐졌고, 선조 34년(1601)과 37년(1604)에도 관찰사< 觀察使 > 이시발< 李時發 >과 찰리사< 察理使 > 곽재우< 郭再祐 >에 의해 수축된 것이다. 삼국시대< 三國時代 >의 산성양식을 간직하고, 삼국시대 고분군< 古墳群 >이 이웃하여 있어 처음 쌓았던 연대를 삼국시대로 볼 수 있다. 성안에는 군창< 軍倉 >·군기고< 軍器庫 >를 비롯하여 만지암< 萬持庵 >이란 사찰< 寺刹 >이 있었고 별장< 別將 >이 배치되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던 산성이다.
이 산성< 山城 >은 신라< 新羅 >의 시조< 始祖 > 박혁거세< 朴赫居世 >가 처음 쌓고, 곽재우< 郭再祐 >(1552∼1617) 장군< 將軍 >이 왜적을 맞아 싸웠다고 전해오는 유서깊은 곳이다. 이 성은 천연적으로 형성된 험준한 암벽의 사이를 자연할석< 自然割石 >을 이어쌓아 우리나라 특유의 산성형식대로 쌓았다. 둘레가 1km를 넘고 성안이 넓으며 우물 하나와 연못 2개가 있었다. 이웃한 금오산성< 金烏山城 >이나 가산산성< 架山山城 >과 더불어 의각< 椅角 >의 형세를 이루어 옛 인동현< 仁同縣 >의 읍민< 邑民 >을 난리로부터 보호하여 왔던 곳이다. 현재의 성벽과 문터는 임진왜란< 壬辰倭亂 >으로 새로이 이 성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수축되어 선조< 宣祖 > 29년(1596) 현감< 縣監 > 이보< 李輔 >에 의해 고쳐졌고, 선조 34년(1601)과 37년(1604)에도 관찰사< 觀察使 > 이시발< 李時發 >과 찰리사< 察理使 > 곽재우< 郭再祐 >에 의해 수축된 것이다. 삼국시대< 三國時代 >의 산성양식을 간직하고, 삼국시대 고분군< 古墳群 >이 이웃하여 있어 처음 쌓았던 연대를 삼국시대로 볼 수 있다. 성안에는 군창< 軍倉 >·군기고< 軍器庫 >를 비롯하여 만지암< 萬持庵 >이란 사찰< 寺刹 >이 있었고 별장< 別將 >이 배치되어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던 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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