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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가면무

by 넥스루비 2007. 8. 7.

울산 남구 신정동

처용무는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비롯된 가면무로 향악정재이며,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쫓아내는 벽사진경의 의식무로서 전승되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처용무가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사> 충혜왕조와 신우조(辛禑條)에는 처용희(處容戱)를 즐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성현의 <용재총화> 권1에는 '처용무는 원래 흑포사모(黑布紗帽)하고 한 사람이 추었다' 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오늘날과 같은 오방처용무로서 구성된 시기는 조선초기(세종조 무렵)로 추정된다. 성종조의 <악학궤범>에는 처용무를 추는 방법, 처용탈, 처용무복 제장 방법까지 소상히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12月 회일(晦日) 하루 전날 궁중에서 나례(儺禮)를 행한 뒤에 전도(前渡)와 후도(後度) 두 차례에 걸쳐 처용무를 추었다. 전도에서는 오방처용무를 추고, 후도에서도 역시 오방처용무를 추되 요신극환(搖身極歡)이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전도처용무와는 다른 점이 있다. 즉 전도처용무는 구나(驅儺) 뒤에 오는 의식적인 춤이고, 후도처용무에서는 이어 학무(鶴舞), 연화대(蓮花臺) 정재를 연출한 다음 미타찬, 본사찬, 관음찬, 등불가를 화창(和唱)하게 된다"

고 하였다. 조선말기의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忽記)>에 의하면 성종 때에 연출되던 그 후도처용무의 잔영이 남아 미타찬 이하 불가를 곁들이기도 한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현재는 불가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게 된다.

처용탈은 저포(苧布) 혹은 칠포(漆布)로 껍질을 만들고 채색을 적면유광(赤面油光)으로 하여 처용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덕(有德)한 모습으로 만든다. 탈에 씌운 사모는 대(竹)로 망을 얽어 종이를 발라 만들고 모란꽃을 그리며, 두 귀에는 주석고리와 납주를 걸고 복숭아 열매와 가지를 단다.

복식을 보면 옷은 오방의 방위 빛깔에 따라서 동쪽의 청, 중앙의 황, 남쪽의 홍, 서쪽의 백, 북쪽의 흑으로 구분하고 앞과 뒤 그리고 소매에는 만화(蔓花)를 그린다. 천의(天衣)는 녹단(綠段)에 만화를 그리고 안은 오방이 모두 홍주를 쓴다. 상(裳)은 황초를 쓴다. 군(裙)은 동과 북은 홍단, 서와 남은 흑단, 중앙은 남단(藍段)을 쓴다. 한삼(汗衫)은 오방이 모두 백초를 쓴다. 대(帶)는 홍정을 쓴다. 화(靴)는 오방을 모두 백피(白皮)로 만들고 근을 단다.

처용무는 일명 오방처용무라고도 이르며 오방을 상징하는 동·남·중앙·서·북의 다섯 처용의 군무이다. 지금까지 전송되는 궁중무용 중에 유일하게 탈을 쓰고 행하며 그 춤 역시 화려하고 나긋나긋한 느낌이 드는 다른 무용에 비해 처용무는 느리고 장중한 느낌이 드는 춤이라서 보는 이의 입장에서 의식무임을 알 수가 있다.

* 처용무의 짜임새

⑴ 처용5인이 두 팔을 허리에 붙이고 청·홍·황·흑·백의 차례로 수제천(壽齊天,빗가락 정읍)을 아뢴 다음 들어와 좌로 돌아 북쪽을 향한다.
⑵ 처용 5인이 모두 소매를 들었다가 다시 어깨 위에 걸쳐 놓고 허리를 구부려 마주본다.(무릎디피춤)
⑶ 다시 발을 들고 소매를 들어 안으로 낀다. (도돔춤)
⑷ 그 다음 내디디며(발바딧춤) 중앙에서 북쪽을 향한다.
⑸ 각기 앞뒤로 나아가 각 방향에 선다. (발바딧작대춤)
⑹ 다시 무릎디피춤을 추고 5인이 가지런히 선 다음 뒤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노래를 한다.
⑺ 6/4박자 한 장단인 잔도돌이(細還入)의 반주와 그 장단에 따라 낙화유수(落花流水)의 춤사위, 즉 두 팔을 양쪽 어깨로 들었다가 뿌리는 동작을 하면서 한 사람식 퇴장을 한다.

처용무는 1971년 1월 중요문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예능 보유자로는 김천흥(金千興 1909 ~ ), 봉해룡(奉海龍 1911 ~ ), 김기수(金琪洙), 김태섭(金泰燮 1922 ~ ), 김용(金龍 1933 ~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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