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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시 건입동 1275
옛 제주성 바깥 동쪽, 서쪽에 두 미륵이 성안을 지키듯 서 있는 바, 이 두 미륵은 그 형상도 의연할뿐더러 이에 따른 속신 역시 유별나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 주민들은 이 두 미륵을 '복신미륵<福神彌勒>' (동복신미륵<東福神彌勒>·서복신미륵<西福神彌勒>). '자복미륵<資福彌勒>' (동자복미륵<東資福彌勒>·서자복미륵<西資福彌勒>). '자복신<資福神>' (동자복<東資福>·서자복<西資福>). '미륵' (동미륵·서미륵). '돌미륵' (동돌미륵·서돌미륵). '미륵부처' (동미륵부고, 서복신미륵은 제주시 용담3동 속칭 동한두기의 사찰 경내에 있다. 동복신미륵이 세워진 동네일대는 예전에 '미륵밧' 이라는 밭이었다. 서복신미륵은 사찰 경내에 있으므로 그 사찰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 이 동서<東西>에 마주 보며 서 있는 두 복신미륵<福神彌勒>은 차양이 빙 둘러진 너부죽한 모자를 썼고, 커다란 귀, 우뚝한 코, 지그시 다문 입, 인자스레 내려다보는 눈매 등 자비로운 불상<佛像>으로서 일품<逸品>이다. 몸에는 예복<禮服>을 걸쳤고, 두 손은 가슴에 정중히 모두어졌는데, 그소맷자락이 유난히 선명하다. 서복신미륵은 하반신 일부가 생략된 채 기석(基石>으로 받쳐졌다. 서복신미륵인 경우 그 곁에 크기가 약 75㎝의 동자불<童子佛>(불자<佛子>·양석<陽石>)이 세워졌는 바, 이는 남근<男根>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게다가 이 두 미륵을 두고 성구별<性區別>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적송지성<赤松智誠>과 추엽륭<秋葉隆>은 함께 지은 《조선무속<朝鮮巫俗>の연구<硏究>(하권<下卷>)》 (p.94, p.132 및 참고도록 p.33)에서 서복신미륵은 남성으로, 동복신미륵은 여성으로 보고 있다. 서복신미륵에 달린 동자불의 존재와 맥락이 닿는 견해이다. 그러나 성구별 역시 과제로 남는다.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동기로 동·서복신미륵이 세워진 것인지 아직은 불분명하다. 이에 따른 어떠한 문헌기록도 아직까지 찾을 수 없는데, 다만 제주도에 흔한 현무암<玄武岩>으로 만들어진 점으로 제주도내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큰 절의 승려가 제주도에 오고보니 이렇다할 미륵성상이 없음을 못마땅히 여기고 이의 건립을 강력히 주창한 것이 이를 세우게 된 동기였다고 전승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 두 복신미륵에 얽힌 기자습속<祈子習俗>은 극성스러울 만큼 대단하다. 1968년 조사 당시만 하더라도 그 주변의 주민들에게 물으면 한결같이 이미륵들에 치성함으로써 득남<得男>한 사실을 보았거나 들은 적이 있다고들 했다. 그치성은 주민들의 재래적 무속신앙<巫俗信仰>과 밀착되었다. 예전에는 무격<巫覡>이 주관하여 득남하려는 여인과 이 동 서복신미륵을 찾고 규모를 갖춘 의례를 치렀었다고 전해진다. 치성한 효험이 있어서 다행히 득남한 여인들은 이 미륵을 '조상'이라고 극진히 섬겨 왔다고 한다.
제주 제주시 건입동 1275
옛 제주성 바깥 동쪽, 서쪽에 두 미륵이 성안을 지키듯 서 있는 바, 이 두 미륵은 그 형상도 의연할뿐더러 이에 따른 속신 역시 유별나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 주민들은 이 두 미륵을 '복신미륵<福神彌勒>' (동복신미륵<東福神彌勒>·서복신미륵<西福神彌勒>). '자복미륵<資福彌勒>' (동자복미륵<東資福彌勒>·서자복미륵<西資福彌勒>). '자복신<資福神>' (동자복<東資福>·서자복<西資福>). '미륵' (동미륵·서미륵). '돌미륵' (동돌미륵·서돌미륵). '미륵부처' (동미륵부고, 서복신미륵은 제주시 용담3동 속칭 동한두기의 사찰 경내에 있다. 동복신미륵이 세워진 동네일대는 예전에 '미륵밧' 이라는 밭이었다. 서복신미륵은 사찰 경내에 있으므로 그 사찰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 이 동서<東西>에 마주 보며 서 있는 두 복신미륵<福神彌勒>은 차양이 빙 둘러진 너부죽한 모자를 썼고, 커다란 귀, 우뚝한 코, 지그시 다문 입, 인자스레 내려다보는 눈매 등 자비로운 불상<佛像>으로서 일품<逸品>이다. 몸에는 예복<禮服>을 걸쳤고, 두 손은 가슴에 정중히 모두어졌는데, 그소맷자락이 유난히 선명하다. 서복신미륵은 하반신 일부가 생략된 채 기석(基石>으로 받쳐졌다. 서복신미륵인 경우 그 곁에 크기가 약 75㎝의 동자불<童子佛>(불자<佛子>·양석<陽石>)이 세워졌는 바, 이는 남근<男根>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게다가 이 두 미륵을 두고 성구별<性區別>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적송지성<赤松智誠>과 추엽륭<秋葉隆>은 함께 지은 《조선무속<朝鮮巫俗>の연구<硏究>(하권<下卷>)》 (p.94, p.132 및 참고도록 p.33)에서 서복신미륵은 남성으로, 동복신미륵은 여성으로 보고 있다. 서복신미륵에 달린 동자불의 존재와 맥락이 닿는 견해이다. 그러나 성구별 역시 과제로 남는다.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동기로 동·서복신미륵이 세워진 것인지 아직은 불분명하다. 이에 따른 어떠한 문헌기록도 아직까지 찾을 수 없는데, 다만 제주도에 흔한 현무암<玄武岩>으로 만들어진 점으로 제주도내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큰 절의 승려가 제주도에 오고보니 이렇다할 미륵성상이 없음을 못마땅히 여기고 이의 건립을 강력히 주창한 것이 이를 세우게 된 동기였다고 전승되기도 한다. 어쨌든 이 두 복신미륵에 얽힌 기자습속<祈子習俗>은 극성스러울 만큼 대단하다. 1968년 조사 당시만 하더라도 그 주변의 주민들에게 물으면 한결같이 이미륵들에 치성함으로써 득남<得男>한 사실을 보았거나 들은 적이 있다고들 했다. 그치성은 주민들의 재래적 무속신앙<巫俗信仰>과 밀착되었다. 예전에는 무격<巫覡>이 주관하여 득남하려는 여인과 이 동 서복신미륵을 찾고 규모를 갖춘 의례를 치렀었다고 전해진다. 치성한 효험이 있어서 다행히 득남한 여인들은 이 미륵을 '조상'이라고 극진히 섬겨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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