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래구 복천동 50번지
이 기념탑은 부산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 탑 가운데에 3.1운동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서있고 탑에 건립취지문과 부산의 독립운동의 간략한 역사에 대해 새겨놓았다.
- 부산 3.1 독립운동기념탑 건립 취지문
여기 이 탑은 내 고장 내 겨레는 우리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깨우쳐 줌에 있다고 하겠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 총칼 앞에 나라가 넘어지고 10여 성상이 지나도 끈질긴 민족의 귀항은 멎지 않았으니 하늘인들 어찌 무심할 수 있었으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세계사의 새 흐름을 타고 온 민족은 가슴에 한을 품고 때를 기다렸다.
1919년 3월 1일 드디어 일어서니 독립을 외치는 만세 소리는 서울 하늘에 메아리치고 태극기는 온 거리를 뒤엎었으며 의거의 소식은 이내 백두대간을 타고 남북으로 내리치달았다. 10월에 이르러 만세 운동은 부산 전역으로 터져갔고 항쟁은 고장을 옮겨가며 이어졌다.
'일본은 물러가라, 대한 독립 만세'
피와 억으로 얼룩진 깃발을 앞세우고 민중은 손에손에 태극기를 거머쥐고 만세를 외쳤다. 총칼 앞에 죽음을 무릅슨 민중의 분노는 성난 파도와 같았으며, 산마루의 봉화는 삼천리를 누볐고 만세꾼은 동서로 줄달음쳐 항거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밤낮으로 이어져 독립의 의지는 불꽃처럼 타오르니, 이 어찌 한겨레의 승리가 아니랴. 총칼과 맨주먹의 싸움이 어찌 단판에 이길 수 있으랴만, 일제는 마침내 통치 방법을 바꾸었고, 겨레는 이로써 독립의 기틀을 마련 했나니 이 일을 영원히 잊지 말자.
우리는 이 탑 앞에서 자주독립과 조국번영의 각오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것이다. (1996.03.01)
- 부산 3.1 독립운동 약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가 우리의 자주독립을 온 천하에 선언하자 부산 각처에서도 격렬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1일밤 일신여학교 학생이 좌천동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니 수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이 의거는 부산지방 3.1독립운동의 첫 봉화가 되었다. 3월 13일 동래 장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수천 민중의 봉기가 있었으며 3월 18일과 19일 동래 시장의 시위에는 범어사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립 학생과 군중이 합류하여 시위를 벌였다. 3월 29일 구포 장날 대형 태극기와 현수막을 앞세운 수많은 군중의 대규모 집회와 경찰 파출소 습격이 있었고, 4월 5일 기장읍 장날 1천여명이 궐기하였으며 잇달아 장안면과 일광면 정관면에서도 농민과 장꾼이 합세한 가두 시위가 있었다. 4월 10일 명지의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이 밤에도 부산상업학교 부산진보통학교 영도옥성학교 학생들의 구국거사와 의일청년들의 열차투석 전차운전자들과 철도 직공들의 항일 동맹파업 및 시민드리의 항쟁이 5월까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산 각 지역의 독립투쟁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인원은 2백명이 넘었고 실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1백 50명에 이르렀으며 이같은 민족투지는 조국독립의 밑바탕이 되었다.(1996년 3월 1일 이대길, 최태군 짓고 조영조 쓰다)
[대중교통]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동래역이나 명륜동역에서 하차 - 마을버스 1번 또는 6번을 이용하여 복천동박물관에서 하차 - 박물관옆으로 난 길을 따라 도보로 15분정도 오르면 시민체육시설이 나온다. 그곳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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