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향사당 - 고을의 한량들이 당면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해 논하던 곳

by 넥스루비 2007. 8. 7.

제주 제주시 삼도1동 973-2

향사당은 고을의 한량들이 봄 가을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하여 논하던 곳이다.
향사당은 애초에 가락천 서쪽에 지었던 것을 조선 숙종17년(1691) 절제사 이우항 당시 판관 김동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향사당이라 이름 하였다. 정조21년(1797) 방어사 유사모는 그 이름을 향사당이라 고쳐불렀다. 이 건물은 조선 초기에 좌수의 처소로 쓰이다가 고종16년(1879)에는 신성여학교 교지로 이용되었다. 1981년에 다시 지었는데 이때 길가에 붙어 있어 동남향이던 집방향을 동북향으로 바꾸었다. 양식은 한식일자 팔작지붕과 5고주 7량이며 툇칸과 내진주 사이에 우물마루가 있고 바닥은 강회 다짐을 하였다. 기둥은 각주 민흘림, 기단은 현무암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조선시대 마을에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여서 향중의 여러 일들을 의논하고 鄕射讀法(향사독법)을 하며, 鄕案(향안)을 보관하고 三鄕任(삼향임)-좌수·좌별간·우별감)이 상시 근무하던청사이다. 처음에는 留鄕所(유향소)로서 기능을 하였으나, 1475년(성종 6)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周(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禮樂德行(예락덕행)을 세우는 데 제일인 '鄕射飮禮(향사음예)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이라 개칭하였다. 사는 공자가 "지명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賢人(현인)을 얻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옛날 어진 임금들이 몸소 仁義(인의)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한 것을 모방한 것이다. 제주도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향사당은 제주시 삼도1동에 자리잡고 있다. 봄·가을에 전 고을 사람들이 모여 주연과 함께 활쏘기를 행하던 곳이다.
향사당은 당초 가락천 서쪽에 있었으나 1691년(숙종 17) 김동 판관이 현 위치로 옮겨 지었고, 1797년(정조 21) 柳師模(유사모)방어사가 건물의 명칭을 향사당이라 편액하였다. 임원으로는 座首(좌수) 1인과 別監(별감) 3인이 있었는데, 이후 지방의 자치기간인 鄕廳(향청)의 기능을 갖게 되면서 민심의 동햐을 살피고 주민의 여러 가지 일들을 자치적으로 의논하여 처리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81년에 고쳐지은 것인데, 1980년 건물을 해체할 때, 천장과 장혀사이에서 "崇楨紀元後四乙未(숭정기원후사을미)-헌종 1년, 1835) 이월 이십사일 上樑(상량)"이란 墨書(묵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향사당은 이 해에 마지막으로 보수된 것 듯하다.
향사당은 전면 5칸과 좌후와 좌측에 퇴가 있는 팔작집으로, 2중의 낮은 기단 위에 원뿔대의 장구초 위에 방주를 세운 민가 형식의 건물이다. 전통건축은 평면이 5칸을 기본형으로 하고 이 중 중앙의 세칸을 板廳(판청)으로 양익칸을 방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향사당을 측한칸을 방으로 쓰는 외에 전부가 판청이고 전후의 퇴간은 개방된 토방이며 측퇴는 수장공간이다. 넉넉한 굵기의 方柱(방주)로 퇴보와 장혀를 사쾌맞춤으로 받치고 도리를 얹고 있다. 홑처마이고 가칠단청의 소박한 이 건물은 원래는 동남향이던 것을 1981년 개보수하면서 동북향으로 좌향을 바꾸었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