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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북정 -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렸던 곳

by 넥스루비 2007. 8. 7.

제주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2690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 바닷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제주도유형문화재 제 3 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북정은 객사(客舍)로, 원래 조천성(朝天城) 밖에 있었다고 하나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1590년(선조 23)에 이옥(李沃) 절제사가 성을 동북쪽을 물려 쌓고 그 위에 옮겨 세워 '쌍벽정(雙碧亭)이라 하였다. 교수 곽기수(敎授 郭期壽)의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조천관(朝天館)은 바다 어귀에 있는데, 육지에 나가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는 곳이다. 조천(朝天)이라 이름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절제사 이옥이 부임한 다음 해 경인년(庚寅年)에 막부(幕府)의 제공(諸公)과 협의하고 아전(衙前)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館)을 둔 것은 실로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같이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농사짓는 틈틈이엑 개축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이에 휘하에 명하니, 전(前) 부장(部將) 서만일(徐萬鎰)이 그 일을 주관하고 애써서 마침내 여러 재주 있는 역군들을 동원하여 10월에 착공하고 12우러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雙碧)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쌍벽(雙碧)은 청산록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599년(선조 32)에는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그 건물으 중수하고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하였다. 이것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인데, 보수 당시 "룡가경이십오년경진(순조 20년, 1820) 이월십오일 진시입주상량 호(龍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 辰時入柱上樑 虎)"라 한 명문(銘文)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연북정은 1820년(순조 20)에 마지막으로 보수된 듯하다. 이 정자가 세워져 있는 조천포구는 화북포와 함게 과누언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휴식처이기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이 정자가 경찰관주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연북정은 원래 조천성 위에 남동향을 하고 있는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후 좌우퇴의 평면에 구조는 7량으로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배열방법이 모두 제주 민가형 건물이다. 지붕이 합각지붕으로 된 것만이 민가와 다르며, 그물매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은 네모꼴에 가까운 높이 14자의 축대 위에 동남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이 축대이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고가이 둘려 쌓여 있는데 조선조 시대 제주를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요새인 9진중의 하나인 조천진이다. 방형주초에 각주를 세우고 기둥머리에 퇴보를 놓고 여기에 직각으로 장혀를 보내어 도리를 받쳤는데 사괘 맞춤한 기둥이 도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바닥은 퇴칸이 토상(土床)이고, 내진에는 우물마루로 해서 사방이 정자처럼 틔어 있으나 예전에는 석축벽(石築壁)을 둘러서 사용한 적이 있다.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성벽위에 초루를 세워 이름을 쌍벽이라 하고 무기고, 창고, 당(堂)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진내(鎭內)의 주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내진고주의 보아지와 판대공의 투박한 마무리와 낮은 물매의 지붕, 단청도 없는 간결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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