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3가 1
객사< 客舍 >는 고려< 高麗 >·조선시대< 朝鮮時代 >에 고을에 설치했던 객관< 客館 >으로 출장< 出張 >을 나온 관원< 官員 >이나 외국사신< 外國使臣 >의 숙소< 宿所 >로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주전< 主殿 >(본관< 本館 >)에 전패< 殿牌 >를 안치< 安置 >하고 국왕< 國王 >에게 배례< 拜禮 >를 올렸으며, 국가 경조시< 慶弔時 >에는 민관< 民官 >이 합동< 合同 >으로 의식< 儀式 >을 거행< 擧行 >하거나 외객< 外客 >을 접대< 接待 >할 때는 연회장< 宴會場 >으로 사용되었다. 전주객사< 全州客舍 >는 전주사고< 全州史庫 >를 지은 뒤 남은 재료< 材料 >로 조선 성종< 成宗 > 2년 (1471)에 서익헌< 西翼軒 >을 개축< 改築 >한 기록< 記錄 >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건립< 建立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주관< 主館 >과 동< 東 >·서익헌< 西翼軒 >·맹청< 盲聽 >·무신사< 武神祠 >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관< 主館 >과 서익헌< 西翼軒 >과 수직사< 守直舍 >만 남아 있다. 주관의 현판< 懸板 >에 쓴 '풍패지관< 楓牌之館 >'은 전주< 全州 >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 朝鮮王朝 >의 발원지< 發源地 >라는 뜻이다. 현재 초석< 礎石 >만 남아 있는 동익헌은 서익헌과 규모가 같으나 도로확장으로 인해 1칸이 부족하다.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정면하여 내삼문< 內三門 >˙중삼문< 中三門 >˙외삼문< 外三門 >이 있었으나 원래의 내삼문 안쪽으로 경역< 境域 >이 축소< 縮小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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