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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고평오가옥 - 학술적 가치가 높은 민속가옥

by 넥스루비 2007. 8. 7.

제주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809

이 가옥은 고평오씨의 증조부가 순조 29년(1829)에 건립한 한일자형 우진각 지붕 초가로서,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목거리(헛간채) 및 대문간이 갖추어진 ㄷ자형이다. 서쪽 목거리는 70년대 중반에 헐렸고 안거리와 밖거리는 최근에 보수되었다. 안거리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작은 구들 없는 3칸집으로 장항굽(장독대) 만을 둘러 싼 안뒤 공간과 정지(부엌) 안에 시설된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봉덕화로가 특이하나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밖거리는 원래 관원들이 하숙을 하던 곳으로 제주도의 여느 집과 달라서 상방 (대청)이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한쪽에 있으며, 집의 뒤 퇴에는 골방이 있다. 목거리에는 수렛간이 있다. 먼문간(대문)이 따로 만들어진 것은 도시 주거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다.

18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옥은 성읍민속마을의 주요도로였던 남문길 길가에 위치해 있고 이문간(6평)이 뚜렷해서 얼른 보더라도 고풍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규모를 갖춘 이문간을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남향인 안거리(안채, 18평)와 북향인 밖거리(바깥채, 17평)가 마주하여 서있고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 동쪽에 모커리(12평)가 서향으로 앉아 있다. 전에는 마당 서쪽에도 동향으로 모커리가 있어서 건물들이 구자형(口字形)으로 배치되었었으나, 이 서쪽 모커리는 1970년대 중반에 헐렸다. 그리고 안거리와 밖거리는 1979년에 보수되었다.

대지가 널찍해서 325평에 이르는데, 안거리 뒤에 장독대가 놓이고 동백나무가 헌칠하게 서있는 공간이 여유로우며 밖거리 뒤에는 우영(터앝)이 있어서 조화를 이룬다. 안거리 상방문에는 이른바 '호령창'이라는 작은 문이 달려 있는데, 이는 제주도내에서도 남부 일부 지역에만 전해지는 가옥형태다. 안거리 정지에는 돌을 네모로 둘러박아서 만들어진 붙박이 화로인 '부섭'이 있었는데, 1979년 보수할 당시에 없애버렸다. 더욱이나 1979년 보수 당시 안거리의 주춧돌이 시멘트로 탈바꿈되는 착오가 생기기도 했다. 밖거리는 현청소재지 당시부터 면사무소가 표선리로 옮겨질 때까지 관원들이 숙식(宿食)하던 곳으로 제주도 내의 다른 집의 구조와는 다르다. 곧 상방이 집 한가운데 위치하지 않고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며, 뒤쪽 툇마루가 있을 자리에는 골방이 달려 있다. 모커리는 수레간과 남방에(통나무로 된 제주 특유의 절구) 등을 보관하던 헛간과 쇠막(외양간)으로 쓰였었다. 1970년대 초까지 고평오와 그의 부친이 이 가옥에 함께 살 때에는 고평오가 독립생계를 갖춤에 따라, 그의 부친이 밖거리로 옮기고 아들에게 내어주었었다. 당시 중요한 소득원이 되는 통시(변소)도 두 군데에 마련되어 두 부자가 각기 나누어 쓰곤 했다. 두 개 통시의 원위치는 모커리의 남쪽과 밖거리 뒤쪽이었다.

대문 밖 길 건너 맞은쪽에는 음료수를 공급하던 이른 바 '남문통(관청물)'의 터가 남아있다. 이젠 움푹 패인 채 그 자취만 남아있지만, 이 우물에 고인 물은 정의고을의 관원들만이 마실 수있었던 음료수였다는데, 이 가옥의 밖거리가 관원들의 숙식처였다는 사실과 연관되는 듯하다. 이 고평오 가옥은 널따란 대지 위에 건물의 배치가 규모를 갖추었을 뿐더러, '호령창', '부섭' 등 제주 고유의 시설과 관원숙소였다는 밖거리의 특수한 가옥구조 및 규모있는 대문간 등으로 보아 학술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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