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주시 삼양동 2081번지
망건은 고려말 조선초에 비롯한 것으로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을 여며매기 위해 말총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머리띠이다. 즉 상투를 틀고 머리를 음접하기 위한 이 머리띠는 매우 한국적인 의관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여겨왔는데 개화 이래 삭발에 따라 점차 쇠퇴해버려, 현재는 수요가 거의 없게 되었다. 망건은 본래 한국에서 발달되어 중국에까지 파급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고, 혹은 당 이래로 도교< 道敎 > 계통에서 생겨 명대에 성행되었다고도 하나, 오히려 한국 나름의 말총 공예로서 잔존하는 형편이다. 조선시대 『경국대전 > >에 의하면 공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의 망건장이 배치되었고 망건에 부수되는 관자< 貫子 >에 관해서는 엄격한 규제가 시행되었다. 망건끈을 꿰어 잡아매는 고리인 이 관자는 일품< 一品 >에는 비취옥환< 玉環 > 즉 옥관자를 달고, 이품< 二品 >에는 금관자, 당상관에는 보통의 흰 옥관자로 하며, 당하관 이하 사속< 士屬 >은 대모< 玳瑁 >나 양각< 羊角 > 등을 써서 관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성호사설 星湖塞說 > >, 『오주연문장전산고 五州衍文長箋散藁 > >. 또 앞가리의 살춤 위로는 반달모양의 호박풍잠을 큼직하게 다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호사스럽게 꾸미기 위한 부착물에 불과하다. 망건의 제작은 말총에 한하지 않는다. 총이 가는 것일수록 고운 제품이 되기 때문에 때로는 인모< 人毛 >망건을 가장 섬세정교한 것으로 귀히 여기기도 했다. 따라서 망건은 전국 각지에서 각기 제작해 이용했을 것으로 보는데, 조선 후기 문헌에 지방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규합총서 > >에서는 석성< 石城, 공주 公州 >을 지목했고, 보다 앞서 『성호사설 > >에서 김제< 金堤 >의 갓과 총모자 제품이 제주 것보다 낫다고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이들 관모 제작 지역에서 망건도 만들었을 것 같다. 이러한 언급은 현재 잔존하는 기능분포와 상당히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망건은 실바디와 바늘북 의 단순한 직조기법으로 편자< 하대 下帶 >를 머리 둘레만큼의 길이로 짜는 일부터 시작된다. 편자는 날과 씨를 모두 말총으로 대는데, 말총을 물에 적셔 놓으면 부드러워 부러지지 않는다. 다 된 편자를 망건골에 걸어놓고, 말총을 바늘에 꿰어 설주부터 뜨기 시작하며, 우변에 속하는 뒷바닥은 촘촘히 하고 이마에 닿는 앞가리 부분은 성글게 뜬다. 상대< 上帶 >에 해당하는 당< 살춤 >을 떠서 신축성을 갖게 하는데, 당을 뜨는 기법이 유난히 까다롭다. 여기까지가 총결의 작업이다. 그 다음 당에는 당줄을 걸어매고 편자와 설주는 명주싸개로 선을 둘러 관자를 붙이면 완제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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