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중구 우정동
우리나라의 주성황신사(州城隍神祠) 제도는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이다.
고려 문종(1047-1082) 때 신설의 성진(성진)에 성황신사를 두기 시작한 것이 차차 전국에 시행하게 되었다.
조선조에 내려와서는 이를 계승하여 태조 때는 모든 산천과 성황신에 봉호(封號)를 내리게 되고 이후 공의(公儀)로서 계속되었다.
성황(城隍)이라는 것은 원래 성지(城池)의 뜻에서 성지로 둘러싸인 성읍(城邑)의 수호신(守護神)을 말하는 것이다.
울산의 성황신사를 살펴보면 경상도지리지는 신명을 일러 계변신(戒邊神)이라 하였고 신사가 읍성안에 있으며 수령이 직접 행제(行祭)한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역시 읍성안에 계변신을 받드는 성황사가 있다 하였다.
그러나 영조 25년본 학성지는 말하기를 사직단이나 성황사가 아울러 부의 서쪽 5리 태화루 옛터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생각컨데 정유재란 때 읍성은 헐어지고 성곽이 없는 고을이 되매 구성내를 벗어나 화진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순조 31년본 경상도읍지에 수록된 울산읍지는 부서3리에 있다 하였으니 더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 분명한데, 정조10년본 읍지도 마찬가지로 부서 3리에 있다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부서 3리에 옮긴 것은 분명하나 그 위치를 알 수 없었으나 광무6년본 읍지는 부서3리 우암촌(牛岩村)에 있다 하여 그 위치마저 밝혀 놓았다.
울산의 주성황당(州城隍壇)을 검증하여 보았으나 이는 동제(洞祭)의 서낭신과는 그 근본이 다른 것이다.
우정삼거리 북쪽에 있는 해묵은 느티나무는 계변천신의 신체(神體)였던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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