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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사 유적 - 정치와 병학(兵學)을 배우면서 의렬사들의 전기를 탐독하고...

by 넥스루비 2007. 8. 7.

울산 중구 옥교동

고헌 박상진은 1884년 12월 7일에 울산시의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에서 한문을 배우다 16세가 되어 학덕이 높던 허위(許蔿)의 문하에 들어가 정치와 병학(兵學)을 배우면서 의렬사들의 전기를 탐독하고 스승의 훈도(薰陶)를 받은 바가 지대하였다.
1907년에 허위가 고종황제의 의거밀명을 받고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는가 하면, 1910년에는 대구(大邱)에 상덕태(尙德泰)상회라는 곡물상회를 차려 국내의 혁명기지로 삼고 중국의 여러차례 여행을 통하여 진행중에 있던 중국 신해혁명을 거울삼아 그의 국권회복 방략을 무장독립전쟁에 두고 비밀(秘密),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강령을 구상하여 이것이 그대로 대한광복회의 강령이 되었다.
박상진은 1913년에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본부 운동에 투신하다가 1914년에는 대한독립 의군부에 가담하였고 1915년 7월 15일에는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총사령이 되었다.
그는 이로써 군자금을 모아 무력준비를 하고 무관을 양성하며, 또 군인을 양성, 무기를 구입, 혁명기지로서의 기관설치(機關設置), 행형부(行刑部)를 두어 반역자를 처단하여 무력이 완비 되는대로 무력전을 단행하여 국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로써 대한광복회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장하는 한편 전국의 부호들에게 재산에 비례한 군자금의 의연(義捐)을 통고하여 군자금 조달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조달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한광복회는 일제 식민지주로 안주하며 군자금 출연을 거절하는 친일지주들을 처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탄로되어 1917년 12월 20일 박상진이 체포되고 다른 동지들도 검거되어 조직은 거의 와해되었으며 1921년 8월에 박상진 등은 처형되고 말았다.
박상진 등은 체포뒤에도 국내에 남아 있었던 동지들은 계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 박상진의 대한광복회 운동은 곧 3.1운동으로 이어져 조국광복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울산에는 박상진의 생가가 송정동에 있고, 학성공원에는 추모비가 옥교동에는 동상이 있다.
또 경주군 외동읍 녹동리에는 성장한 유허가, 외남면 노곡에는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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