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중구 반구동
반구정 토성지는 반구동 290-2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성인데 서원(書院)마을의 뒷편 구릉지대가 그것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택지로 변해버렸다.
이것을 1991년에 아파트 건축공사 때 일부 드러난 것을 조사하여 토성지임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종전에는 이것을 반구정왜성(倭城)으로 보았으나 반구정토성지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왜성이라는 것은 울산성지고에 나타나는「장제(長堤)」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장제란 것은 속칭 나팔등이라 하던 것인데 이지환(李之丸)의 동북 돌각지점에서 동으로 뻗었던 것이며 그 길이 109간(間)25(218m 50)나 되던 선박의 옹폐를 겸한 성지방위를 위하여 축조되었던 것으로 상폭은 14m 내지 16m 였다.
반구정토성지는 조사결과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초기에 축조된 것임을 알게 되었고, 토성의 하부상면(下部床面)에서 신라시대의 건축지가 다시 나타났다.
이 토성지의 조사당시에는 아파트공사로 성지의 대부분이 멸실되고 동천(東川)으로 면한 20m 정도 남은 것을 조사하였으며 성의 형태는 별첨 반구정토성지 주변 측량도의 점선과 같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토성은 구릉지의 정상 동, 서, 북에서 남으로 축조되어 구릉 남사면(南斜面)이 성내가 되도록 하였으리라 믿어진다.
그러므로 옛 서원마을은 이 성내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의 반구동과 학성동 일대는 신라말의 개지변(皆知邊) 또는 계변성(戒邊城)이라 부르던 곳인데 나말려초에 박윤웅(朴允雄)이라는 호족이 나타나서 고려 태조 13년(930)에 하곡(河曲), 동진(東津), 우풍(虞風)의 세현과 임관(臨關), 동안(東安)의 두 군을 합하여 흥례부(興禮府)로 올려 그 치소(治所)를 두었던 울산의 중심지였던 곳이며 조선조 후기까지도 울산에서는 가장 연구가 조밀하였던 곳이다.
한편으로 지리적으로 본다면,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 조에 병영성을 일러 바다 어귀로부터 3리 떨어졌다라고 기록된 걸로 미루어 공설운동장이 있는 정지말들(井之末野)이나 관상들은 물론 마단들(三山平野) 및 왕생이들(王生野)이 모두 신라말이나 고려 때는 바다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구정토성지는 바로 바다로 돌출하였던 곳이었던 곶(串)에 축성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그 당시 태화강이나 동천강은 현재보다는 휠씬 상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울산의 이지역 일대가 신라 서울로 들어가는 물목이기었기 때문에 이곳 해면을 둘러싼 곳에는 여러 군데의 성을 축조하였다.
반구정토성은 물론이고 바다의 건너편 효문산성(孝門山城). 관문성(關門城). 신정동 은월봉의 사포진성(絲浦鎭城). 문수산 정상의 굴아화성(屈阿火城). 학성동 학성산의 토성이 있고, 학성공원에 계변성(戒邊城)이 있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학성산토성이 학성공원까지도 이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이 반구정토성의 축조년대를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축성한 것으로 보는데 고려초에 동북여진족(東北女眞族)의 침입에 대비키 위하여 울주에 성보의 축성기록이 나타난다.
고려 현종2년(1011)에 청하, 흥해, 영일, 장기, 울주 등의 동해안에 성보를 축조하여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 고려사가 단지 울주에 축성하였다고 하여 어느 성인지는 명시한 바가 없으나 이때의 울주 치소가 반구동쪽이고 보면 이 반구정토성으로 일단 비정(比定)하여 볼 만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사실 현종 9년(1018)에 전국의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을 단행하였을 때 울주를 군사주(軍事州)로 만들어 방어사를 파견하였던 것도 동북여진족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