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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제2전시관(근대 민족 운동관) - 1860연대부터 1910년 국권상실 이전까지의 민족사

by 넥스루비 2007. 8. 7.
충남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230번지

19세기 중엽 이후 우리 민족은 밖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였고, 안으로는 전극대적인 사회체제를 극복하여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국각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사상으로 개화사상, 동학사상, 위정척사사상 등이 일어나 서로 다른 방법으로 당면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1894년에는 농민들이 외세의 침략을 배격하고 국내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고, 이듬해 을미사변을 계기로 전국적인 의병전쟁이 전개되었다.

한편 갑오경장이 추진되었으나 일본의 간섭으로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각종 이권들이 열강들에게 넘어가자, 서구 시민 사상을 수용한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1896년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자주독립, 자유민권, 자주자강 운동을 전개하여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의식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의병전쟁은 1894년부터 비롯되었으나 1905년 을사5조약 체결을 계기로 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기 시작하여 1907년 8월 일제가 얼마 남지 않은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시키자 해산 군인들이 의병전투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의병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08년 1월에는 전국 의병 부대가 연합한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격 작전을 전개하여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 후에도 의병부대들은 단위 부대별로 항전을 계속하다가 일본군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의병들은 투쟁의 근거지를 만주와 노령지방으로 이동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학술, 언론, 종교계 등 각계 각층에서 실력양성 운동을 전개하여 자주적인 역량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 내려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국권수호를 위한 애국계몽운동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여 목숨을 버린 열사들의 순국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 반대운동, 국채보상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의 전개 등을 통하여 국가의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이밖에도 전국적으로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높이고, 민족문화와 역사를 새롭게 인식시키고자 국학관련 저술들을 간행한 국학진흥운동, 민족종교운동, 해외 독립군기지 창설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이 전시관에는 1860년대부터 1910년 우리나라의 국권이 상실되기 이전까지의 시기에 우리 민족이 열강세력에 대항해서 민족의 자주권과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서 전개하였던 다양한 민족운동을 근대민족운동실, 의병전쟁실, 애국계몽운동실 등 3개의 실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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