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시 신교동 62
고려<高麗> 공민왕<恭讓王> 2년(1390년)에 옥곡동<玉谷洞>에 창건<創建>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전화로 소실<燒失>되어 조선<朝鮮> 명종<明宗>5년, 인조<仁祖> 11년에 중수<重修>하는 등 여러차례 중수<重修>를 거듭하다가 숙종<肅宗> 7년(1681년)에 현재의 신교동<新校洞>으로 이건<移建>하여 매년<每年> 춘추기<春秋期> 음력<陰曆> 2월, 8월 초정일<初丁日>날 5성<聖> 22현<賢>에 대해 봉향<奉享>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전쟁으로 인하여 5성<聖>의 위패<位牌>가 소실<燒失>될 위기<危機>에 처하였을 때 당시의 향교<鄕校> 교복<校僕>으로 있던 강개명<姜開明>이 5성<聖>의 위패<位牌>를 성암산<聖岩山> 동굴<洞窟>로 옮겨 피난<避難>시켜 무사히 보존<保存>할수 있었다. 이를 알고 당시 관<官>에서 알고 강개명<姜開明>의 공로<功勞>를 찬양<讚揚>하여 공복<公僕>과 아울러 부세를 면<勉>하게 하였다 한다. 하지만 현재<現在>의 경산향교<慶山鄕校>는 일제시대<日帝時代>때 명륜당<明倫堂>이 경산초등학교<慶山初等學校> 건립시<建立時> 운동장<運動場>으로 편입되어 없어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대성전<大成殿>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경산향교<慶山鄕校>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지 않는 대성전<大成殿>이 앞에 나와 있고 명륜당<明倫堂>이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 전묘후학형<前廟後學形>의 특이한 형태<形態>를 갖추고 있었다.
고려<高麗> 공민왕<恭讓王> 2년(1390년)에 옥곡동<玉谷洞>에 창건<創建>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전화로 소실<燒失>되어 조선<朝鮮> 명종<明宗>5년, 인조<仁祖> 11년에 중수<重修>하는 등 여러차례 중수<重修>를 거듭하다가 숙종<肅宗> 7년(1681년)에 현재의 신교동<新校洞>으로 이건<移建>하여 매년<每年> 춘추기<春秋期> 음력<陰曆> 2월, 8월 초정일<初丁日>날 5성<聖> 22현<賢>에 대해 봉향<奉享>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전쟁으로 인하여 5성<聖>의 위패<位牌>가 소실<燒失>될 위기<危機>에 처하였을 때 당시의 향교<鄕校> 교복<校僕>으로 있던 강개명<姜開明>이 5성<聖>의 위패<位牌>를 성암산<聖岩山> 동굴<洞窟>로 옮겨 피난<避難>시켜 무사히 보존<保存>할수 있었다. 이를 알고 당시 관<官>에서 알고 강개명<姜開明>의 공로<功勞>를 찬양<讚揚>하여 공복<公僕>과 아울러 부세를 면<勉>하게 하였다 한다. 하지만 현재<現在>의 경산향교<慶山鄕校>는 일제시대<日帝時代>때 명륜당<明倫堂>이 경산초등학교<慶山初等學校> 건립시<建立時> 운동장<運動場>으로 편입되어 없어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대성전<大成殿>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경산향교<慶山鄕校>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지 않는 대성전<大成殿>이 앞에 나와 있고 명륜당<明倫堂>이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 전묘후학형<前廟後學形>의 특이한 형태<形態>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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