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목포시 죽교동 330-3
목포 시사는 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1907년에 창건한 건물로서 전국 각처에서 200여명이 매년 춘추로 2회에 걸쳐 백일장을 개최하여 한시의 명맥을 오늘에까지 전수해 온 국내 유일의 시사이다. 이곳 시사에는 무정의 문집을 비롯하여 구한말의 전적 및 많은 한시현판 등을 소장하고 있다. 무정 정만조는 고종 26년(1899)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승지를 거쳐 내부참의, 궁내부참의관, 규장각부제학 등을 지냈으며 한일합방 뒤에는 경성제대(현 서울대) 강사를 지냈다. 한때 광무년간 정변시 권신들의 무고로 진도에 유배되어 10여 년간 을 보내면서 후진교육을 위하여 문학, 서예 등을 가르쳐 많은 인사를 배출하였고 이와 함께 목포시사를 창건하여 퇴폐한 유풍을 바로잡아 지방문화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정면 4간, 측면 1간반으로 팔작지붕이다. 일단의 다듬은 돌기단위에 정평의 기초를 놓고 민흘림의 원 주를 세웠다. 가구는 기둥 위에 전퇴의 보아지가 보이며 장여와 도리로 결구한 민가형이다. 처마는 홑 처마이고 전면에는 마루를 깔았다. 창호는 전면2간은 사분합 띠살문이며 양퇴간은 이분합 띠살문으로 되었다. 원래는 좌우와 후면의 중방이 벽돌로 된 것을 1979년, 1984년 2회에 걸쳐 벽돌을 제거하고 옥개부 이상을 보수하였다
목포 시사는 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1907년에 창건한 건물로서 전국 각처에서 200여명이 매년 춘추로 2회에 걸쳐 백일장을 개최하여 한시의 명맥을 오늘에까지 전수해 온 국내 유일의 시사이다. 이곳 시사에는 무정의 문집을 비롯하여 구한말의 전적 및 많은 한시현판 등을 소장하고 있다. 무정 정만조는 고종 26년(1899)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승지를 거쳐 내부참의, 궁내부참의관, 규장각부제학 등을 지냈으며 한일합방 뒤에는 경성제대(현 서울대) 강사를 지냈다. 한때 광무년간 정변시 권신들의 무고로 진도에 유배되어 10여 년간 을 보내면서 후진교육을 위하여 문학, 서예 등을 가르쳐 많은 인사를 배출하였고 이와 함께 목포시사를 창건하여 퇴폐한 유풍을 바로잡아 지방문화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정면 4간, 측면 1간반으로 팔작지붕이다. 일단의 다듬은 돌기단위에 정평의 기초를 놓고 민흘림의 원 주를 세웠다. 가구는 기둥 위에 전퇴의 보아지가 보이며 장여와 도리로 결구한 민가형이다. 처마는 홑 처마이고 전면에는 마루를 깔았다. 창호는 전면2간은 사분합 띠살문이며 양퇴간은 이분합 띠살문으로 되었다. 원래는 좌우와 후면의 중방이 벽돌로 된 것을 1979년, 1984년 2회에 걸쳐 벽돌을 제거하고 옥개부 이상을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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