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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용암리 석등 - 한국 굴지의 거대한 석등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188-1

우리나라의 석등으로는 가장 큰 것의 하나이며, 아깝게도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졌다. 8각의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는 2매석으로 되었으며 8각하대의 각 측면에는 가늘고 길쭉한 안상(眼象)을 새기고 상하에는 굽을 둘렀다. 이 위에 올려진 연화대석 위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8판씩 조각하였는데 그 끝에는 큼직한 귀꽃을달아 장식하였다. 간주석은 원주형으로 중앙에는 북모양으로 배가 부른 양각대가 있고 상, 하단의 주위에는 복엽8판의 양,복면을 대칭이 되도록 조각하였다. 상대석에는 낮고 높은 2단의 원형괴임이 조출(彫出)되고 측면에는 단엽8판의 암연이 새겨져있다. 화사석(火舍石)은 8면에 모두 장방형의 화창을 내었다. 옥개석은 하면에 3단의 낮은 괴임츨 각출하였고 추녀의 낙수흠도 각이낮다. 전각 끝에는 삼선형의 큼직한 귀꽃을 세워 놓았고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모습을 모이고 있다. 낙수면의 각 합각은 뚜렷하며 상부에 복연을 놓아 상륜부를 받도록 하였다. 옥개석 정상에는 현제 8각의 노반과 암화석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보개(寶蓋)와 보주(寶珠)등 여러 가지 상륜부재가 있었을 것이다. 이 석등은 조각된 문양이 섬세하고 다양하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석등이 있는 중기사는 건립연대가 확실치는 않지만, 신라중엽에 창건되었다하며 번성했을 당시에는 수도승이 천여명을 헤아렸다고 전한다. 중기사 본당 앞 50여m 전방에 세워진 석등의 규모로 미루어 이곳에 거대한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중기사가 폐허로 변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지승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절 앞에 흐른는 섬진강이 엄청난 홍수로 범람하는 바람에 사찰은 물론 승려 모두가 홍수에 휩쓸린 후 폐허로 변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중기사는 1924년에 당시 주지 박봉주씨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당은 정면4칸, 측면2칸의 함석지붕으로 이루어져 요사(療舍)를 겸하고 있다. 본당 우측 동현으로 정면 2칸, 측면칸도 역시 함석지붕으로 이루어져 산신각(山神閣)이 세워져 있다. 법당의내부에는 좌불이 안치되어 있는데 석불의 몸체에 흰 페인트칠을해 예술적인 가치를 크게 훼손시켰다. 중기사에 보존된문화재로서 잘알려진 것은 연화좌대이다. 이 좌대는 1924년 중기사를 재건할 당시 현 중기사의 서쪽 50m 지점에 위치한 광명제에서 출토 되었다 하며 지방유형문화재 제 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작연대는 혹실하지 않으나 문양등의 규모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중기사법당의 앞뜰에는 중기사 주위에 널려져 있던 옥개석 3장과 탑신, 노반을 모아 편리한 상태로 쌓아놓은 탑이있다. 이들 옥개석과 옥석받침 등은 대단히 정교하게 다듬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바로 이곳에 13층 탑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발굴을 통해 묻혀있는 기단부를 조사해야 알수 있을 것이다. 1992년 실시된 용암사지 1차발굴을 통해 이미 지정된 문화재 석등이나 연화좌대 이외에 귀면암, 암악새 등 185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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