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옥정동 439-6
농암< 聾巖 > 이현보< 李賢輔 >는 연산군-중종-명종년간의 문신< 文臣 >이며 학자< 學者 >로서 강호가도< 江湖歌道 >의 창도자< 倡導者 >로 일컬어지는 시조작가< 時調作家 >로 특히 유명한 인물이다. 현재 농암< 聾巖 >의 종손가에서 소장< 所藏 >하고 있는 자료들은 교지< 敎旨 > 등 고문서류< 古文書類 >를 비롯하여 전적류< 典籍類 > ·회화류< 繪畵類 > 등 다양한 문화재가 많다. 이 유고< 遺稿 >들은 모두 간본< 刊本 > 농암집< 聾巖集 >에 수록< 收錄 >되었다. 정동면례시일록< 亭洞緬禮時日錄 > 부< 附 > 영정개모시일기< 影幀改摹時日記 >는 정조15년(1791) 10월 농암< 聾巖 > 묘소< 墓所 >를 이장< 移葬 >할 때의 사실을 적은 일기< 日記 >인 정동면례시일기< 亭洞緬禮時日記 >, 이장< 移葬 >할 때의 만사< 輓詞 > ·제문< 祭文 > ·묘갈명< 墓碣銘 > ·고유문< 告由文 >과 순조< 純祖 >25년< 年 >(1825) 농암< 聾巖 >의 영정< 影幀 >을 개모< 改摹 >할 때의 전후 사실을 적은 영정개모일기< 影幀改摹日記 > 등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정동면례시일기< 亭洞緬禮時日記 > ”는 농암< 聾巖 >의 9세손 이만흡< 李萬흡 >(1740∼1814)이 면례< 緬禮 >가 시작된 1789년(정조 13) 봄부터 일을 끝마친 1791년(정조 15년) 10월< 月 > 6일< 日 >까지의 시말을 적은 일기체의 기록이다. 《영정개모시일기< 影幀改摹時日記 >》는 농암< 聾巖 >의 10세손 이시옥< 李時沃 >(1761∼1846)이 농암< 聾巖 >의 영정< 影幀 >을 다시 모사< 摹寫 >하면서 그 과정을 일기로 적은 것이다. 농암< 聾巖 >의 영정개모< 影幀開摹 >는 추사< 秋史 > 김정희< 金正喜 >의 추천을 받은 소당< 小塘 > 이재관< 李在寬 >의 손에 의해 이룩되었다. 이 영정< 影幀 >의 제작에는 12일이 소요되었고, 봉안식< 奉安式 >도 유림< 儒林 > 400명이 모여 성대히 거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당음비사< 棠陰比事 >는 중종< 中宗 >35년< 年 >(1540) 4월< 月 >에 국왕< 國王 >이 당시 형조참판< 刑曺參判 >인 농암< 聾巖 > 이현보< 李賢輔 >에게 내린 선사본< 宣賜本 >이다. 표지< 表紙 > 이면< 裏面 >에 중종< 中宗 >35년< 年 >(1540)의 내사기< 內賜記 >가 있고, 첫장 우측상단< 右側上端 >에「선사지기< 宣賜之記 >」란 선사인< 宣賜印 >이 찍혀있다. 은대계회도< 銀臺契會圖 >는 중종< 中宗 >29년< 年 >(1534)에, 은대< 銀臺 > 곧 승정원동료관원< 承政院同僚官員 >의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계회도< 契會圖 >이다. 이 계회도는 훼손< 毁損 >이 심한데, 특히 계회< 契會 >장면의 그림이 식별하기 어려운 것이 유감이다. 상< 上 > ·중< 中 > ·하< 下 > 3단< 段 >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단< 上段 >은 그림이고, 중단< 中段 >은 시< 詩 >이며, 하단< 下段 >은 좌목< 座目 >이다. 맨 위에「은대계회도< 銀臺契會圖 >」란 제목< 題目 >이 전서체< 篆書體 >로 쓰인 흔적이 있는데 일부< 一部 > 떨어져 나갔다. 중단< 中段 >에는 다음과 같은 시< 詩 >와 작시년월일< 作詩年月日 >이 적혀 있다. 독서당< 讀書堂 > ·기로< 耆老 > ·미원< 薇垣 > ·하관< 夏官 > ·호조랑관< 戶曺郎官 > 등의 계회도< 契會圖 >는 이미 문화재< 文化財 >로 지정된 바 있는데 은대계회도< 銀臺契會圖 >는 처음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훼손이 심하기는 하나 계회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농암< 聾巖 > 이현보< 李賢輔 >는 연산군-중종-명종년간의 문신< 文臣 >이며 학자< 學者 >로서 강호가도< 江湖歌道 >의 창도자< 倡導者 >로 일컬어지는 시조작가< 時調作家 >로 특히 유명한 인물이다. 현재 농암< 聾巖 >의 종손가에서 소장< 所藏 >하고 있는 자료들은 교지< 敎旨 > 등 고문서류< 古文書類 >를 비롯하여 전적류< 典籍類 > ·회화류< 繪畵類 > 등 다양한 문화재가 많다. 이 유고< 遺稿 >들은 모두 간본< 刊本 > 농암집< 聾巖集 >에 수록< 收錄 >되었다. 정동면례시일록< 亭洞緬禮時日錄 > 부< 附 > 영정개모시일기< 影幀改摹時日記 >는 정조15년(1791) 10월 농암< 聾巖 > 묘소< 墓所 >를 이장< 移葬 >할 때의 사실을 적은 일기< 日記 >인 정동면례시일기< 亭洞緬禮時日記 >, 이장< 移葬 >할 때의 만사< 輓詞 > ·제문< 祭文 > ·묘갈명< 墓碣銘 > ·고유문< 告由文 >과 순조< 純祖 >25년< 年 >(1825) 농암< 聾巖 >의 영정< 影幀 >을 개모< 改摹 >할 때의 전후 사실을 적은 영정개모일기< 影幀改摹日記 > 등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정동면례시일기< 亭洞緬禮時日記 > ”는 농암< 聾巖 >의 9세손 이만흡< 李萬흡 >(1740∼1814)이 면례< 緬禮 >가 시작된 1789년(정조 13) 봄부터 일을 끝마친 1791년(정조 15년) 10월< 月 > 6일< 日 >까지의 시말을 적은 일기체의 기록이다. 《영정개모시일기< 影幀改摹時日記 >》는 농암< 聾巖 >의 10세손 이시옥< 李時沃 >(1761∼1846)이 농암< 聾巖 >의 영정< 影幀 >을 다시 모사< 摹寫 >하면서 그 과정을 일기로 적은 것이다. 농암< 聾巖 >의 영정개모< 影幀開摹 >는 추사< 秋史 > 김정희< 金正喜 >의 추천을 받은 소당< 小塘 > 이재관< 李在寬 >의 손에 의해 이룩되었다. 이 영정< 影幀 >의 제작에는 12일이 소요되었고, 봉안식< 奉安式 >도 유림< 儒林 > 400명이 모여 성대히 거행된 것으로 나타난다. 당음비사< 棠陰比事 >는 중종< 中宗 >35년< 年 >(1540) 4월< 月 >에 국왕< 國王 >이 당시 형조참판< 刑曺參判 >인 농암< 聾巖 > 이현보< 李賢輔 >에게 내린 선사본< 宣賜本 >이다. 표지< 表紙 > 이면< 裏面 >에 중종< 中宗 >35년< 年 >(1540)의 내사기< 內賜記 >가 있고, 첫장 우측상단< 右側上端 >에「선사지기< 宣賜之記 >」란 선사인< 宣賜印 >이 찍혀있다. 은대계회도< 銀臺契會圖 >는 중종< 中宗 >29년< 年 >(1534)에, 은대< 銀臺 > 곧 승정원동료관원< 承政院同僚官員 >의 계모임하는 모습을 그린 계회도< 契會圖 >이다. 이 계회도는 훼손< 毁損 >이 심한데, 특히 계회< 契會 >장면의 그림이 식별하기 어려운 것이 유감이다. 상< 上 > ·중< 中 > ·하< 下 > 3단< 段 >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단< 上段 >은 그림이고, 중단< 中段 >은 시< 詩 >이며, 하단< 下段 >은 좌목< 座目 >이다. 맨 위에「은대계회도< 銀臺契會圖 >」란 제목< 題目 >이 전서체< 篆書體 >로 쓰인 흔적이 있는데 일부< 一部 > 떨어져 나갔다. 중단< 中段 >에는 다음과 같은 시< 詩 >와 작시년월일< 作詩年月日 >이 적혀 있다. 독서당< 讀書堂 > ·기로< 耆老 > ·미원< 薇垣 > ·하관< 夏官 > ·호조랑관< 戶曺郎官 > 등의 계회도< 契會圖 >는 이미 문화재< 文化財 >로 지정된 바 있는데 은대계회도< 銀臺契會圖 >는 처음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훼손이 심하기는 하나 계회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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