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왕정동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
발굴전에는 무릎 아랫부분이 지하에 묻혀있었으나 발굴후 좌대까지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보니 높이가 약 4m로 불신(佛身)과 광배까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훌륭한 조각품이다.
움츠린듯한 양 어깨가 좁고 하체도 다소 빈약한 편이나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쳐진 대의(大衣)는 몸에 꼭 붙어서 몸의 굴곡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리에서 갈라지는 이른바 Y자형, 우다야나(Udyana)식의 착의법으로 표현된 것은 인도 굽타(Gupta)기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의 불상들과 비교된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공(白毫孔)이 뚜렷하다. 비록 눈과 코는 손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과 미소 띤 인자한 모습의 얼굴은 살아있는듯한 느낌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양손은 결실되었는데 원래는 손을 따로 만들어 손목에 끼웠을 것으로 보이며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의 통인(通印)을 짓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윗부분은 깨어졌지만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안에 새겨진 연꽃줄기가 선명하고 그 바깥부분(외연부)에는 화염문과 화불(化佛)을 조각하였다.
이 조각은 형식화된 옷주름이나 대칭적인 불의의 양깃, 넓게 열림 평평한 가슴과 신체 등의 어색한 표현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만 불상규모나 기법면에서 당시의 조각으로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상의 광배 뒷면에도 불상을 손가락으로 그린 것 같이 음각해 두었는데 정병을 쥔 수인에서는 관음상이 분명하나 육계가 완연한 머리모양과 백호들로 미루어 그리 흔치 않은 약신여래불이다.
음각한 선이 유연하고 선의 흐름도 곱다.
현재 절터에 남아있는 오층석탑 및 석조대좌와 함께 만복사 창건 당시에 같이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입상.
발굴전에는 무릎 아랫부분이 지하에 묻혀있었으나 발굴후 좌대까지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보니 높이가 약 4m로 불신(佛身)과 광배까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훌륭한 조각품이다.
움츠린듯한 양 어깨가 좁고 하체도 다소 빈약한 편이나 통견식(通肩式)으로 걸쳐진 대의(大衣)는 몸에 꼭 붙어서 몸의 굴곡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리에서 갈라지는 이른바 Y자형, 우다야나(Udyana)식의 착의법으로 표현된 것은 인도 굽타(Gupta)기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의 불상들과 비교된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공(白毫孔)이 뚜렷하다. 비록 눈과 코는 손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과 미소 띤 인자한 모습의 얼굴은 살아있는듯한 느낌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양손은 결실되었는데 원래는 손을 따로 만들어 손목에 끼웠을 것으로 보이며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의 통인(通印)을 짓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윗부분은 깨어졌지만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안에 새겨진 연꽃줄기가 선명하고 그 바깥부분(외연부)에는 화염문과 화불(化佛)을 조각하였다.
이 조각은 형식화된 옷주름이나 대칭적인 불의의 양깃, 넓게 열림 평평한 가슴과 신체 등의 어색한 표현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만 불상규모나 기법면에서 당시의 조각으로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상의 광배 뒷면에도 불상을 손가락으로 그린 것 같이 음각해 두었는데 정병을 쥔 수인에서는 관음상이 분명하나 육계가 완연한 머리모양과 백호들로 미루어 그리 흔치 않은 약신여래불이다.
음각한 선이 유연하고 선의 흐름도 곱다.
현재 절터에 남아있는 오층석탑 및 석조대좌와 함께 만복사 창건 당시에 같이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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