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265
이 정려는 임진왜란시 중봉 조헌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분전하다가 순절한 박천붕과 그 뒤 병자호란때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싸우다가 순사한 4아들, 즉 장자 원겸, 차자 인겸, 삼자 례겸, 사자 의겸의 충절을 인정하여 영조 24년(1748)에 명정되어 건립된 것이다. 정려의 원래 위치는 평장리 화암부락 뒷편에 있었으나 정조 24년(1800)에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었으며, 그 후로 80여년이 지난 고종 23년(1886)에 현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정면 삼간, 측면 일간의 정려내에는 신구비 2기가 있는데, 구 비는 1886년 건물을 이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방형의 나직한 기단에 비신과 팔작형 옥개석(총높이 1.37m)을 갖추었다. 전면 은「밀양박씨오충기실비」라 해서체(자경 10cm)로 쓰고 뒷면 은 아무런 명문이 없다. 그러나 원래 오충정여에 대한 내용을 기록해 두었으나 1983년 일경에 의해 임의로 글자가 훼손되어 업어진 것이다. 그 뒤로 일제가 물러나고 다시 각문하여 신비를 건립하였다. 신비의 내용을 보면, 전면에 「밍양박씨오충기록비」라 각하고 (자경 10cm)배면과 좌우면에 오부자간의 순 절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찬에는 송사 기주만(구한말 의병장)이다. 신비는 총높이 1.82m로 나직한 방형기단에 비신 (높이 140cm, 폭 54.5cm, 두께 27cm)과 팔작형의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박천붕(1545~1592)은 충청도 연기군 출신으로 중봉 조헌의 종 사관이 되어 승장 영규와 함께 구전하다가 청주에서 순절하였다.
이 정려는 임진왜란시 중봉 조헌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분전하다가 순절한 박천붕과 그 뒤 병자호란때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싸우다가 순사한 4아들, 즉 장자 원겸, 차자 인겸, 삼자 례겸, 사자 의겸의 충절을 인정하여 영조 24년(1748)에 명정되어 건립된 것이다. 정려의 원래 위치는 평장리 화암부락 뒷편에 있었으나 정조 24년(1800)에 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었으며, 그 후로 80여년이 지난 고종 23년(1886)에 현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정면 삼간, 측면 일간의 정려내에는 신구비 2기가 있는데, 구 비는 1886년 건물을 이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방형의 나직한 기단에 비신과 팔작형 옥개석(총높이 1.37m)을 갖추었다. 전면 은「밀양박씨오충기실비」라 해서체(자경 10cm)로 쓰고 뒷면 은 아무런 명문이 없다. 그러나 원래 오충정여에 대한 내용을 기록해 두었으나 1983년 일경에 의해 임의로 글자가 훼손되어 업어진 것이다. 그 뒤로 일제가 물러나고 다시 각문하여 신비를 건립하였다. 신비의 내용을 보면, 전면에 「밍양박씨오충기록비」라 각하고 (자경 10cm)배면과 좌우면에 오부자간의 순 절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찬에는 송사 기주만(구한말 의병장)이다. 신비는 총높이 1.82m로 나직한 방형기단에 비신 (높이 140cm, 폭 54.5cm, 두께 27cm)과 팔작형의 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박천붕(1545~1592)은 충청도 연기군 출신으로 중봉 조헌의 종 사관이 되어 승장 영규와 함께 구전하다가 청주에서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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