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체암 나대용장군은 임진란 때 이충무공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에 전력을 기울인 실직적인 공로자로 평가되고 있다. 고향인 나주군 문평면 오룡리 오륜동에서 10여년간 거북선에 대한 설계도 및 제작과정을 연구한 후 마을앞 방죽골에서 첫 시험을 끝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전라수군절도사인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그 제작을 협의하니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았고 그 후 임란이 일어나자 거북선 3쌍을 처음으로 진수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충무전서』『난중일기』『나주읍지』『호남동순록』『이조실록』 등에서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나대용장군은 충무공과 함께 사천승첩을 비롯하여 당포전, 당항포전, 견내량전, 안골포전, 명량대첩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임란 후에는 새 전함인 쟁선을 창안 제조하였으며, 이어 남해현감으로 있을 때는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 하기도 했다. 공은 1556년에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583년 훈련원 별시에 응시 병과에 합격하였다. 생가는 남향집으로 정면 사간, 측면 1간, 초가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나 양쪽 끝간에서 후보한 흔적이 있고 원래는 사간 집이 아닌 듯 하다. 묘소는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약 3km 떨어진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체암 나대용장군은 임진란 때 이충무공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에 전력을 기울인 실직적인 공로자로 평가되고 있다. 고향인 나주군 문평면 오룡리 오륜동에서 10여년간 거북선에 대한 설계도 및 제작과정을 연구한 후 마을앞 방죽골에서 첫 시험을 끝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전라수군절도사인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그 제작을 협의하니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았고 그 후 임란이 일어나자 거북선 3쌍을 처음으로 진수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충무전서』『난중일기』『나주읍지』『호남동순록』『이조실록』 등에서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나대용장군은 충무공과 함께 사천승첩을 비롯하여 당포전, 당항포전, 견내량전, 안골포전, 명량대첩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임란 후에는 새 전함인 쟁선을 창안 제조하였으며, 이어 남해현감으로 있을 때는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 하기도 했다. 공은 1556년에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583년 훈련원 별시에 응시 병과에 합격하였다. 생가는 남향집으로 정면 사간, 측면 1간, 초가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나 양쪽 끝간에서 후보한 흔적이 있고 원래는 사간 집이 아닌 듯 하다. 묘소는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약 3km 떨어진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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