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161-1
부조묘는 김완장군의 신위를, 구고사는 그 영정(지방유형문화재 65호)을 모신 건물로서, 두 건물이 모두 정면 삼간, 측면 일간, 맞배지붕의 동일한 형태다. 초창은 김완장군이 서거한 인조 13년(1635)이었으나, 중간에 호재를 만나 소실도고 고종 22년(1889)에 중건하고 1979년에 경내를 광윤 정화하여 현재의 형태를 이루었다. 김완장군은 선조 10년(1577)에 영암군 서호면 몽해에서 출생 하여 인조 13년(1635)에 서거한 무신이다. 자는 자구, 본관은 김해다. 21세(1597)때 정유재란을 당하여 남원의 진사 조경남 ·정사달과 함께 거병하여 크게 공을 세우고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의 막하에 들어갔고 이때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모 포만호·남원판관 등을 역임한 후 서울에 가서 그의 부친을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를 찾아 활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피체 수년간 투옥되었다. 광해군 7년(1615) 관무재시에 급 제, 고산진청절사를 거쳐 창성방어사에 이르러, 인조 2년 (1624) 이괄의 란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로써 진무공신삼등으로 학성군에 봉해졌고, 훈련원도정·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주증되고, 양무의 시호를 받았다.
부조묘는 김완장군의 신위를, 구고사는 그 영정(지방유형문화재 65호)을 모신 건물로서, 두 건물이 모두 정면 삼간, 측면 일간, 맞배지붕의 동일한 형태다. 초창은 김완장군이 서거한 인조 13년(1635)이었으나, 중간에 호재를 만나 소실도고 고종 22년(1889)에 중건하고 1979년에 경내를 광윤 정화하여 현재의 형태를 이루었다. 김완장군은 선조 10년(1577)에 영암군 서호면 몽해에서 출생 하여 인조 13년(1635)에 서거한 무신이다. 자는 자구, 본관은 김해다. 21세(1597)때 정유재란을 당하여 남원의 진사 조경남 ·정사달과 함께 거병하여 크게 공을 세우고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의 막하에 들어갔고 이때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모 포만호·남원판관 등을 역임한 후 서울에 가서 그의 부친을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를 찾아 활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피체 수년간 투옥되었다. 광해군 7년(1615) 관무재시에 급 제, 고산진청절사를 거쳐 창성방어사에 이르러, 인조 2년 (1624) 이괄의 란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로써 진무공신삼등으로 학성군에 봉해졌고, 훈련원도정·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주증되고, 양무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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