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하구 다대동
봉수대(烽燧臺)는 지금의 다대동 북쪽의 아미산에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통신시설(通信施設)이다.
봉수대는 전기통신이 시작되기 이전의 군사통신시설로서 1898(고종 35년)까지 사용되었다. 이곳의 봉수대는 1530년(중종 25년)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는 알 수 없다.
낮에는 짐승 똥으로 연기를 올렸고, 밤에는 횃불을 올려 서울까지 연락되었으며, 평상시에는 1번, 적이 나타나면 2번, 국경에 근접하면 3번, 국경을 침범하면 4번, 적과 접전하면 5번을 올려 그때 그때의 상황을 알렸다.
봉수는 변경지방(邊境地方)에서 일어난 긴급한 정황(情況)을 중앙 또는 인근의 군사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 사용된 것이다.
대략 2∼30리의 거리를 두고 후망(侯望)의 요지가 되는 산봉우리에 봉수대(烽燧臺 : 烽火臺, 煙臺)를 두어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내어 인근의 봉수대에 연락했다.
영남은 다대포가 출발점이 되어 동래 황령산(荒嶺山)을 거쳐 영천, 안동, 충주를 경유 광주(廣州)를 통하여 최종점인 서울 남산까지 이 신호는 전해졌다.
봉수대는 국가의 중대한 업무의 하나이므로 수령(守令)이 봉수군(烽燧軍) 후망(侯望)의 실태를 감독하고 이와 연대책임을 졌다. 다대포 응봉봉수대에 도별장(都別將) 1인을 두었고, 그 밑에 별장(別將) 6명을 두었고, 감고(監考)는 1명, 봉군(烽軍)은 1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봉수대를 관할하는 기관은 다대진(多大鎭)이었다.
다대포 응봉봉수대를 비롯 황령산(荒嶺山), 계명산(鷄鳴山), 간비오산(干飛烏山), 구봉(龜烽), 오해야(吾海也), 석성(石城) 등 7개의 봉수대는 임진왜란때 왜군(倭軍)의 침입시에 그 기능을 발휘한 바도 있어서 이 유지(遺址)는 국방의식의 앙양(昻揚)이란 점에서 중요시되는 문화유산이다.
다대포 봉수대는 1977년 수축(修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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