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광양시 태인동 829-1
『신라동국여지승람』에는 '해의'란 명칭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일명 '김'이라 부르기도 한다. 46개 고을의 토산품으로 처음 기록이 나오는데 전남지방에서는 영광·장흥·나주·영암·진도·강지·해남·순천·보성·고흥·광양 등 11개 고을에서 이미 해의가 생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김'이라고 부르는 토박이 말 대신 '해태'라고 쓴 최초의 기록은 1817년 강진 유배지에서 정약용의『겅세유표』에 "해태에는 감곽 또는 감태라고도 하는데 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그중 해태란 것이있다. 소태를 속칭 해의라고 하고 사누리로 짐이라 한다."는 기록이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조선수산지』에는 광양의 물산으로 쌀·면화·철기·소금·해태 등 다섯가지를 들고, 그중 해태가 가장 중요한 물산이며 국내 수위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광양에서는 해태가 성행했다. '김'의 시식에 대해서는 완도·조약도의 김유몽(「조선の 수 산」, 1924),완도 고금면 요장리 정시원 9「저선어업조합요람 」1942)등의 시식설과 광양의 김여익(1606~1660)의 시식설이 있다. 김여익은 영암 학산면 몽해에서 태어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종형 김여중 수사를 따라 청주에 이 르렀으나 항복하자 돌아온 뒤 고향을 떠나 장흥 동백동을 거쳐 1640년 태인도로 들어가 갈매기와 더불어 살면서 해의를 시식하는 등 명리를 떠나 살았다. 이러한 사정은 1714년(숙종 40) 당시 광양현감이었던 허담(1713.4~1714.9 재임)이 지었다 는 김여익의 묘표에 적혀 있다. 이 묘표는 남아 있지 않으나 김해김씨 족보에 남아 있다. 후손들은 '해태'를 김이라 하는 것은 우리 선조 여익 할아버지가 태인도에서 해의양식법을 창안하였는데 하동장에서는 태인도 김가가 기른 것이라는 뜻으로 김이라 했다고 한다. 어늘날 태인도에 남아 있는 재래식 해태양식은 일본홍이라는 것으로 죽산이나 녹타, 갈대 따위를 모래펄에 꽂는 방식으로 완도의 재래식 해태양식은 시식대 아닌 왕대를 쪽지겅 발 을 만든 뒤 좀 깊은 갯벌에 꽂는 영홍방식이다.
『신라동국여지승람』에는 '해의'란 명칭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일명 '김'이라 부르기도 한다. 46개 고을의 토산품으로 처음 기록이 나오는데 전남지방에서는 영광·장흥·나주·영암·진도·강지·해남·순천·보성·고흥·광양 등 11개 고을에서 이미 해의가 생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김'이라고 부르는 토박이 말 대신 '해태'라고 쓴 최초의 기록은 1817년 강진 유배지에서 정약용의『겅세유표』에 "해태에는 감곽 또는 감태라고도 하는데 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서 그중 해태란 것이있다. 소태를 속칭 해의라고 하고 사누리로 짐이라 한다."는 기록이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조선수산지』에는 광양의 물산으로 쌀·면화·철기·소금·해태 등 다섯가지를 들고, 그중 해태가 가장 중요한 물산이며 국내 수위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광양에서는 해태가 성행했다. '김'의 시식에 대해서는 완도·조약도의 김유몽(「조선の 수 산」, 1924),완도 고금면 요장리 정시원 9「저선어업조합요람 」1942)등의 시식설과 광양의 김여익(1606~1660)의 시식설이 있다. 김여익은 영암 학산면 몽해에서 태어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종형 김여중 수사를 따라 청주에 이 르렀으나 항복하자 돌아온 뒤 고향을 떠나 장흥 동백동을 거쳐 1640년 태인도로 들어가 갈매기와 더불어 살면서 해의를 시식하는 등 명리를 떠나 살았다. 이러한 사정은 1714년(숙종 40) 당시 광양현감이었던 허담(1713.4~1714.9 재임)이 지었다 는 김여익의 묘표에 적혀 있다. 이 묘표는 남아 있지 않으나 김해김씨 족보에 남아 있다. 후손들은 '해태'를 김이라 하는 것은 우리 선조 여익 할아버지가 태인도에서 해의양식법을 창안하였는데 하동장에서는 태인도 김가가 기른 것이라는 뜻으로 김이라 했다고 한다. 어늘날 태인도에 남아 있는 재래식 해태양식은 일본홍이라는 것으로 죽산이나 녹타, 갈대 따위를 모래펄에 꽂는 방식으로 완도의 재래식 해태양식은 시식대 아닌 왕대를 쪽지겅 발 을 만든 뒤 좀 깊은 갯벌에 꽂는 영홍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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