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파리 13
금강사는 이순신장군을 주향하고, 강진출신 증 병조판서 김억추장군을 재향한 사우이다. 정조 5년(1781)에 창건하였으나 고종 5년(1868)에 서원철례령에 의해 훼철당하고, 그 후 광무 5년(1902)에 설단 행기하여 오다가 1946년에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이 사우에는 이순신장군을 주향으로 모시고 김억추장군을 배 향한 것은 김억추장군이 임진왜란때 전라우수사가 되어 이수 신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김억추장군은 명종 3년(1548) 강진군 초곡면 박산촌에서 출생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서거한 무신이다. 자는 방로요, 본관은 청주다. 선조 11년(1578) 31세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장을 비롯하여 많은 관직을 거쳐 순창군수로 재임시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때마침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며서 공의 용력을 믿고 순창에서 불러올려 호종하게 하였다. 평안도 방어사·안주목사로서 갑산전에 실패하여 삭직되었다가 복직 하여 주사대장·수군대장에 배하였는데, 대동강 방어에 공을 세웠다. 그 후 안주·여주를 비롯하여 장흥부사를 거쳐 정유재란 때는 전라우수사 되어 이순신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성공시켰다. 경상·충청병사, 제주목사도 지냈으며 선무원종 공신일등의 호성원종공신일등에 기록되고,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현무의 시호를 받았다. 사당은 정면 삼간, 측면 이간, 맞배지붕으로 기둥은 원주이며, 이 외에 강당과 외삼문 및 부속건물 등이 있다.
금강사는 이순신장군을 주향하고, 강진출신 증 병조판서 김억추장군을 재향한 사우이다. 정조 5년(1781)에 창건하였으나 고종 5년(1868)에 서원철례령에 의해 훼철당하고, 그 후 광무 5년(1902)에 설단 행기하여 오다가 1946년에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이 사우에는 이순신장군을 주향으로 모시고 김억추장군을 배 향한 것은 김억추장군이 임진왜란때 전라우수사가 되어 이수 신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김억추장군은 명종 3년(1548) 강진군 초곡면 박산촌에서 출생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서거한 무신이다. 자는 방로요, 본관은 청주다. 선조 11년(1578) 31세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부장을 비롯하여 많은 관직을 거쳐 순창군수로 재임시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때마침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며서 공의 용력을 믿고 순창에서 불러올려 호종하게 하였다. 평안도 방어사·안주목사로서 갑산전에 실패하여 삭직되었다가 복직 하여 주사대장·수군대장에 배하였는데, 대동강 방어에 공을 세웠다. 그 후 안주·여주를 비롯하여 장흥부사를 거쳐 정유재란 때는 전라우수사 되어 이순신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성공시켰다. 경상·충청병사, 제주목사도 지냈으며 선무원종 공신일등의 호성원종공신일등에 기록되고,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현무의 시호를 받았다. 사당은 정면 삼간, 측면 이간, 맞배지붕으로 기둥은 원주이며, 이 외에 강당과 외삼문 및 부속건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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