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288
섬진강이 반달꼴로 끼고 돌며 멀리 광주 무등산까지 백리가 거침없이 바라보이는 좋은 집자리에 위치했다. 안채는 건축 년대를 19세기 초 정도로 추정하며(구전으로는 18세 기까지 올라감)군지촌 정사와 행랑채는 당시의 건물이 약간 재축 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4간 일자형으로 전후퇴를 두면서도 평면은 겹집의 형태이다. 평면의 구성은 서쪽으로부터 상하 2간 부엌, 다음은 중앙에 큰방, 앞뒤퇴에는 툇마루를 깔고 다음은 전면에 좌우 2간대청을 두며 후면에는 도장과 작은방을 차례로 배열했다. 특이한 점은 툇마루, 안방과 도장 앞은 문시설 없이 개방되었는데 작은방 앞은 머름 넣고 판장문을 달아 동선을 차단한 점이다. 또한 양측면은 기둥을 중앙에 놓으면서도 사이 뼈대는 전후퇴로 처리해서 대청 가운데에 내진주 하나가 서있다. 구조는 4평주5량으로 기단은 자연석 허튼층 쌓기로 네벌대 높이이며 초석은 덤벙주초이다. 전후면과 동쪽 가운데 기둥은 두리기둥으로 하고 기타 내진주 기둥은 네모꼴이다. 도리는 장혀를 받친 납도리로 면을 약간 접었으며 종도리만은 굴도리이다. 대공은 둥 근꼴의 판대공이며 지부은 합각으로 처리되었다. 안채에 축을 맞춘 마당 앞에는 행랑채가 배치되고 이것의 동쪽에 약간 안쪽으로 디밀어 이 집의 사랑채이면서 동네사랑인 군지 정 사가 자리했다. 평면은 3간 전후퇴집으로 서쪽으로부터 가운데에 사랑 아래·웃방이 배치되고, 맨 끝에 대청이 놓였다. 전후퇴에는 모두 마루가 깔리고 대청은 3면으로 개방되었다. 예전에는 동네 서당으로 쓰였다고 하며, 앞뒤로 담장이 없어서 아무데서나 접근하기 쉽게 계획되었다. 자연석 기단, 덤벙주초, 두리기둥으로 되었으며, 집 앞의 커다란 자연석은 정원 시설물처럼 인상적이다
섬진강이 반달꼴로 끼고 돌며 멀리 광주 무등산까지 백리가 거침없이 바라보이는 좋은 집자리에 위치했다. 안채는 건축 년대를 19세기 초 정도로 추정하며(구전으로는 18세 기까지 올라감)군지촌 정사와 행랑채는 당시의 건물이 약간 재축 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4간 일자형으로 전후퇴를 두면서도 평면은 겹집의 형태이다. 평면의 구성은 서쪽으로부터 상하 2간 부엌, 다음은 중앙에 큰방, 앞뒤퇴에는 툇마루를 깔고 다음은 전면에 좌우 2간대청을 두며 후면에는 도장과 작은방을 차례로 배열했다. 특이한 점은 툇마루, 안방과 도장 앞은 문시설 없이 개방되었는데 작은방 앞은 머름 넣고 판장문을 달아 동선을 차단한 점이다. 또한 양측면은 기둥을 중앙에 놓으면서도 사이 뼈대는 전후퇴로 처리해서 대청 가운데에 내진주 하나가 서있다. 구조는 4평주5량으로 기단은 자연석 허튼층 쌓기로 네벌대 높이이며 초석은 덤벙주초이다. 전후면과 동쪽 가운데 기둥은 두리기둥으로 하고 기타 내진주 기둥은 네모꼴이다. 도리는 장혀를 받친 납도리로 면을 약간 접었으며 종도리만은 굴도리이다. 대공은 둥 근꼴의 판대공이며 지부은 합각으로 처리되었다. 안채에 축을 맞춘 마당 앞에는 행랑채가 배치되고 이것의 동쪽에 약간 안쪽으로 디밀어 이 집의 사랑채이면서 동네사랑인 군지 정 사가 자리했다. 평면은 3간 전후퇴집으로 서쪽으로부터 가운데에 사랑 아래·웃방이 배치되고, 맨 끝에 대청이 놓였다. 전후퇴에는 모두 마루가 깔리고 대청은 3면으로 개방되었다. 예전에는 동네 서당으로 쓰였다고 하며, 앞뒤로 담장이 없어서 아무데서나 접근하기 쉽게 계획되었다. 자연석 기단, 덤벙주초, 두리기둥으로 되었으며, 집 앞의 커다란 자연석은 정원 시설물처럼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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