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707
영모당은 1687년(숙종 13) 건립된 해남윤씨 문중제각으로 윤광전, 윤원헌, 윤원학 3부자를 제향하고 있다. 원래 이곳에 영모당이 건립되는 배경은 한천처사 유익이 이곳 은둔에서 비롯되었다. 유익은 어초은 윤효정의 증손이자 행당 윤복의 손자로서 그의 형인 윤유겸과 함께 성균관 유생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던 중 형이 이이담의 폐비상소에 가담하자 이를 만류하였다. 형이 이를 듣지 않자 강진 한천동에서 은둥하던중 우연히 개간중에 선대의 묘전지석을 발견하였고 이로서 실전되었던 윤광전과 두 아들 윤원봉, 윤원학 삼부자의 묘를 찾게 되었다. 윤광전은 해남윤씨의 시조인 윤재부의 8대손으로서 녹우당에 보존되어 있는 보물 제483호 지정사십년노비문권(1534년, 공민왕 3)을 작성했던 인물이다. 이를 계기로 유익을 중심으로한 이곳 해남윤씨들은 묘소를 새롭게 수축하였으며, 1687년(숙종 13)에는 묘성에 영모당을 창건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윤광전, 윤원봉, 윤원학 삼부자를 제향하기로 하였다 한다. 영모당은 창건당시 5칸의 제각과 제직사·대문·자손유숙실 등을 축조하였고 1812년(순조 12)에는 일부를 보수하였다. 최초의 건물은 1970년대 초에 일부 보수된 것이다. 정면 5간, 측면 2간의 단층팔작집으로된 영모당과 ㄷ자형으로 구조된 총 34간 규모의 큰 행각으로 된 행랑채, 그리고 2동 모두 같은 규모와 양식으로 된 정면 3 간, 측면 간의 우진각집으로 된 우사 등이 있다. 이 영모당은 최초 건립된 후 지금까지 거의 최초원형이 유지·관리되고 있으며 제구조들을 고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개으 건물 규모도 상당히 크며 실 의 구조와 배치도 합리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 특히 모당은 규모도 크며 부 재의 결구기법이나 양식적인 면 등이 특히 뛰어나다. 내부를 모두 강당대청 형식 으로 꾸민 것도 다른 지방의 제각과 구별되어지는 요소로써 전면 및 다른 지방 의 어떠한 제각건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제각 건축 연 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영모당은 1687년(숙종 13) 건립된 해남윤씨 문중제각으로 윤광전, 윤원헌, 윤원학 3부자를 제향하고 있다. 원래 이곳에 영모당이 건립되는 배경은 한천처사 유익이 이곳 은둔에서 비롯되었다. 유익은 어초은 윤효정의 증손이자 행당 윤복의 손자로서 그의 형인 윤유겸과 함께 성균관 유생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던 중 형이 이이담의 폐비상소에 가담하자 이를 만류하였다. 형이 이를 듣지 않자 강진 한천동에서 은둥하던중 우연히 개간중에 선대의 묘전지석을 발견하였고 이로서 실전되었던 윤광전과 두 아들 윤원봉, 윤원학 삼부자의 묘를 찾게 되었다. 윤광전은 해남윤씨의 시조인 윤재부의 8대손으로서 녹우당에 보존되어 있는 보물 제483호 지정사십년노비문권(1534년, 공민왕 3)을 작성했던 인물이다. 이를 계기로 유익을 중심으로한 이곳 해남윤씨들은 묘소를 새롭게 수축하였으며, 1687년(숙종 13)에는 묘성에 영모당을 창건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윤광전, 윤원봉, 윤원학 삼부자를 제향하기로 하였다 한다. 영모당은 창건당시 5칸의 제각과 제직사·대문·자손유숙실 등을 축조하였고 1812년(순조 12)에는 일부를 보수하였다. 최초의 건물은 1970년대 초에 일부 보수된 것이다. 정면 5간, 측면 2간의 단층팔작집으로된 영모당과 ㄷ자형으로 구조된 총 34간 규모의 큰 행각으로 된 행랑채, 그리고 2동 모두 같은 규모와 양식으로 된 정면 3 간, 측면 간의 우진각집으로 된 우사 등이 있다. 이 영모당은 최초 건립된 후 지금까지 거의 최초원형이 유지·관리되고 있으며 제구조들을 고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개으 건물 규모도 상당히 크며 실 의 구조와 배치도 합리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다. 특히 모당은 규모도 크며 부 재의 결구기법이나 양식적인 면 등이 특히 뛰어나다. 내부를 모두 강당대청 형식 으로 꾸민 것도 다른 지방의 제각과 구별되어지는 요소로써 전면 및 다른 지방 의 어떠한 제각건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제각 건축 연 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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