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154-4
옥과성황당은 옥과현이 1914년 곡성군에 폐합되기 까지는 국행성황당으로서 현에서 행제해왔다. 폐현후로는 한때 무당들이 행제했으나 그 뒤 사라지고 지금까지 방치되어 왔다. 성화당은 단칸 맞배지붕으로 원래는 옥과리 서남동산에 있다가 시가지 확장으로 현 옥과 고등학교 자리로 옮겼다가 이 자리에 학교가 건립되자 다시 율사리로 옮겼다가 1976년 현 옥과리 옥산사옆으로 성황당을 짓고 그 안에 2구의 본신상을 안치하였다. 이 성황당 제신인 2구 남녀목상은 약 500여년전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wu 있으며 남상은 입상으로 84cm, 여상은 68cm로 좌상이다. 그 형태를 보면 남상 머리에는 무당들이 쓴 모자를 씌웠으며 눈썹이 특이하게 크고 눈이 튀어나와 마치 장생 같은 느낌이다. 허리에는 흉대를 둘러 중앙에서 묶었는데 그 띠가 발등까지 내려 왔다. 여상은 앉은 자세로 머리에는 고깔같은 것을 썼고 얼굴은 남상과는 달리 매우 정교하며 아름다운 조법을 보였다. 손은 두손을 모아 무당이 취하는 형식인 데 손에는 무엇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이 목조신상은 역사상 실존인물이 조통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통은 고려 명종 대 사람으로 경사백가에 통달한 대학자로 옥과형에서 출생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고, 금나라 사신, 태자문학,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 등을 역임했다. 조 통이 죽자 옥과 현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옥과성황당 제신으로 모시고 치 제했다. 또 여상은 조통의 처로 고려의 왕족출신이라 하나 확실치 않다.
옥과성황당은 옥과현이 1914년 곡성군에 폐합되기 까지는 국행성황당으로서 현에서 행제해왔다. 폐현후로는 한때 무당들이 행제했으나 그 뒤 사라지고 지금까지 방치되어 왔다. 성화당은 단칸 맞배지붕으로 원래는 옥과리 서남동산에 있다가 시가지 확장으로 현 옥과 고등학교 자리로 옮겼다가 이 자리에 학교가 건립되자 다시 율사리로 옮겼다가 1976년 현 옥과리 옥산사옆으로 성황당을 짓고 그 안에 2구의 본신상을 안치하였다. 이 성황당 제신인 2구 남녀목상은 약 500여년전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wu 있으며 남상은 입상으로 84cm, 여상은 68cm로 좌상이다. 그 형태를 보면 남상 머리에는 무당들이 쓴 모자를 씌웠으며 눈썹이 특이하게 크고 눈이 튀어나와 마치 장생 같은 느낌이다. 허리에는 흉대를 둘러 중앙에서 묶었는데 그 띠가 발등까지 내려 왔다. 여상은 앉은 자세로 머리에는 고깔같은 것을 썼고 얼굴은 남상과는 달리 매우 정교하며 아름다운 조법을 보였다. 손은 두손을 모아 무당이 취하는 형식인 데 손에는 무엇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이 목조신상은 역사상 실존인물이 조통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통은 고려 명종 대 사람으로 경사백가에 통달한 대학자로 옥과형에서 출생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고, 금나라 사신, 태자문학,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 등을 역임했다. 조 통이 죽자 옥과 현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옥과성황당 제신으로 모시고 치 제했다. 또 여상은 조통의 처로 고려의 왕족출신이라 하나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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