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안 성남리 석장생 - 무안 성남리 석장생

by 넥스루비 2007. 8. 7.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산 4-1

현재 남산공원(충혼탑 입구 좌우측)에 위치하며 본래 위치는 후청마을 입구였다 고 전해진다. 후청마을은 옛날 무안읍성의 남문밖에 있었으며, 지금은 마을 이름 을 '남문밖'으로 부르지만 노인들은 '장승백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몇 년 전까지 만 해도 무안군청 입구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1948년 5월 남산공원 정화사업을 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장생의 재료는 입자가 거칠고 결락이 심한 퇴적암 계통으로 표면에 붉은 반점이 군데군데 박힌 돌을 이용하였다. 형태는 사각의 돌기둥을 전면만 거칠게 다듬질하여 얼굴부위만 형상화하였다. 전면에 동발대장군, 서방대장군이란 명문을 새긴 두 장승의 표현수법은 동일하지만 전체적인 인상에서 풍기는 체취는 대조적이다. 즉, 동방대장군은 건을 쓴 것처럼 머리를 높게 하였고 눈꼬리도 치켜져 있어 남성적으로 보이는 반면에, 서방대장군은 머리에 건도 없으며 자연스럽게 표현된 눈과 우뚝솟은 콧잔등의 표현이 어색하지 않고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있다. 이들 장승은 본디 후청마을 입구에 세워져 마을의 평안과 질병을 막고 재액소멸 을 맡는 수호신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후청마을이 당산제와 장승제, 샘제를 거행시에 이중 장승제는 바로 이두 장승에 거행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제의는 지난 1972년 2월을 마지막으로 소멸되었다. 이 상에서 이들 장승은 마을을 지키는 속신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승의 본래 위치가 예전 무안읍성의 남문 근처였음이 마을의 지명에서 찾을 수 있는 점으로 보아 이는 읍성수호신적 기능을 갖는 장승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한편, 이 마을은 조서 영조 17년(1741)에 조직된 계첩에 당제축문과 진설도 등이 기록되어 전한다. 여기서 향약계와 당산제, 장승제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로 마루어 이들 장승의 제작년대는 늦어도 1700년대 어간일 것으로 추정된다.

댓글

최신글 전체

이미지
제목
글쓴이
등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