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서후면 광평리 1252
거문고는 고구려시대 왕산악이 만들고 100여곡을 지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하며, 그 그림은 집안현 퉁구 17호 고분 등의 벽화에 전한다. 거문고가 신라에 전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8년(668)이다. 거문고는 신문왕 때 얻었다는 신적 만파식적과 함께 월성 천존고에 신기로서 보관하였다. 그러나 일반에게 알리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시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옛 고분 벽화에 보이는 4현의 거문고에서 개량된 것이 현재의 거문고이다. 현재의 거문고는 6줄인데, 1째줄 문현< 文絃 >, 5째줄 괘하청< 下淸 >, 6째줄 무현< 武絃 >은 개방현< 開放絃 >으로 안쪽으로 버티고, 2째줄 유현< 遊絃 >, 3째줄 대현< 大絃 >, 4째줄 괘상청< 上淸 >은 16개의 작은 나무쪽 위에 얹혀 있다. 예전에는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줄을 눌러 탔지만, 선조< 宣祖 >5년(1572) 금합자보 이후로는 줄을 밀어타는 주법으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다양한 기법에 의하여 표현력이 풍부한 거문고로 주법이 바뀐 것은 선조 이후의 일이다. 현재 안동시 서후면에 살고있는 유경시의 10대손인 유기운이 소장하고 있다. 이보는 조선조 숙종조에 영양부사를 지낸 유경시(유경시< 柳敬時 > 1666∼1737)가 필사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당시의 거문고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표지에는 오른쪽부터 “평우조 합부 창랑자 어은< 平羽調合部滄浪者漁隱 > ”이라고 쓰여 있는데 창랑자 어은은 영조 때 활약하던 김성기< 金聖器 >로 알려져 있다. 후반부 우조여민락 7장 끝에 “기해중하기우고리촌가시휘간담출< 己亥仲夏寄寓故里村家時揮干膽出 > ”이라고 쓰여있는 점으로 보아 기해년< 己亥年 >에 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해년< 己亥年 >에 해당하는 해는 1719년(숙종 45년), 1779년(정조 3년), 1839년(헌종 5년) 중 어느해가 될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어은보의 소장자 유기운은 그의 10대조 유경시가 아니라 그의 8대조 유홍원의 필사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은보에 대한 설명에서는 유경시가 1719년에 김성기의 악보를 필사하였다는 상반된 견해를 보인다. 여기서 잠깐 김성기에 대하여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성기의 생몰년대는 미상이나 그는 숙종(1674∼1720)조와 영조(1724∼1776) 때의 가인< 歌人 >으로 거문고, 퉁소, 비파의 명인이었다. 일명 성기< 聲起 >라 하고, 자는 낭옹< 浪翁 >, 어옹< 漁翁 >, 어은< 漁隱 >, 조은< 釣隱 >, 강호객< 江湖客 >이다. 김천택과 교분이 있었으며, 강호가 다섯 수 등 여덟 수의 시조작품이 청구영언에 전하기도 하는바 1728년에는 낭옹신보< 浪翁新譜 >를 만들었으며, 1779년에 편찬된 어은보는 낭옹신보를 저본으로 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경시의 8대 후손인 유기운의 증언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기에 대한 설명은 서로 일치되고 있어 1779년에 유형원에 의해 필사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 하나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는 ‘어은보의 영산회상곡 갑탄 ’에 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1724년에 편찬된 한금신보< 韓琴新譜 >에는 만대엽이 있으나, 어음보에는 만대엽이 없고 중대엽부터 나온다. 어은보 영산회상은 한금신보 본령산에 비하여 간점이 더 많다. 이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장식음이 추가되고 있다는 점과 일치된다.
거문고는 고구려시대 왕산악이 만들고 100여곡을 지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하며, 그 그림은 집안현 퉁구 17호 고분 등의 벽화에 전한다. 거문고가 신라에 전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8년(668)이다. 거문고는 신문왕 때 얻었다는 신적 만파식적과 함께 월성 천존고에 신기로서 보관하였다. 그러나 일반에게 알리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시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옛 고분 벽화에 보이는 4현의 거문고에서 개량된 것이 현재의 거문고이다. 현재의 거문고는 6줄인데, 1째줄 문현< 文絃 >, 5째줄 괘하청< 下淸 >, 6째줄 무현< 武絃 >은 개방현< 開放絃 >으로 안쪽으로 버티고, 2째줄 유현< 遊絃 >, 3째줄 대현< 大絃 >, 4째줄 괘상청< 上淸 >은 16개의 작은 나무쪽 위에 얹혀 있다. 예전에는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줄을 눌러 탔지만, 선조< 宣祖 >5년(1572) 금합자보 이후로는 줄을 밀어타는 주법으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다양한 기법에 의하여 표현력이 풍부한 거문고로 주법이 바뀐 것은 선조 이후의 일이다. 현재 안동시 서후면에 살고있는 유경시의 10대손인 유기운이 소장하고 있다. 이보는 조선조 숙종조에 영양부사를 지낸 유경시(유경시< 柳敬時 > 1666∼1737)가 필사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당시의 거문고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 표지에는 오른쪽부터 “평우조 합부 창랑자 어은< 平羽調合部滄浪者漁隱 > ”이라고 쓰여 있는데 창랑자 어은은 영조 때 활약하던 김성기< 金聖器 >로 알려져 있다. 후반부 우조여민락 7장 끝에 “기해중하기우고리촌가시휘간담출< 己亥仲夏寄寓故里村家時揮干膽出 > ”이라고 쓰여있는 점으로 보아 기해년< 己亥年 >에 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해년< 己亥年 >에 해당하는 해는 1719년(숙종 45년), 1779년(정조 3년), 1839년(헌종 5년) 중 어느해가 될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어은보의 소장자 유기운은 그의 10대조 유경시가 아니라 그의 8대조 유홍원의 필사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은보에 대한 설명에서는 유경시가 1719년에 김성기의 악보를 필사하였다는 상반된 견해를 보인다. 여기서 잠깐 김성기에 대하여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성기의 생몰년대는 미상이나 그는 숙종(1674∼1720)조와 영조(1724∼1776) 때의 가인< 歌人 >으로 거문고, 퉁소, 비파의 명인이었다. 일명 성기< 聲起 >라 하고, 자는 낭옹< 浪翁 >, 어옹< 漁翁 >, 어은< 漁隱 >, 조은< 釣隱 >, 강호객< 江湖客 >이다. 김천택과 교분이 있었으며, 강호가 다섯 수 등 여덟 수의 시조작품이 청구영언에 전하기도 하는바 1728년에는 낭옹신보< 浪翁新譜 >를 만들었으며, 1779년에 편찬된 어은보는 낭옹신보를 저본으로 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경시의 8대 후손인 유기운의 증언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기에 대한 설명은 서로 일치되고 있어 1779년에 유형원에 의해 필사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 하나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근거로는 ‘어은보의 영산회상곡 갑탄 ’에 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1724년에 편찬된 한금신보< 韓琴新譜 >에는 만대엽이 있으나, 어음보에는 만대엽이 없고 중대엽부터 나온다. 어은보 영산회상은 한금신보 본령산에 비하여 간점이 더 많다. 이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장식음이 추가되고 있다는 점과 일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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